杂感 (31)
오후 두 시.
아침부터 달구어진 공기가 열기를 뿜어낸다. 초록으로 덮인 산은 신록을 지나 성큼성큼 여름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점심시간에는 동료와 그늘 찾기에 몰두한다. 푹 익은 오디가 낙화처럼 떨어지는 산뽕나무 아래 차를 밀어 넣고 쉰다. 잠은 오지 않고 끈적한 기운이 목덜미를 감싼다. 집에 돌아가 매일 샤워를 해야 할 만큼 더위는 일상이 되었다. 반팔 셔츠에 드러난 팔뚝은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타기 시작했다. 내리 쏘는 햇볕에 선글라스를 끼고 길을 오가며 근무한다. 드라이브 코스로 좋은 강변길은 휴일엔 나들이 차와 폭주족이 종일 지나간다. 반짝이는 할리 데이비슨에 청바지 여자를 태우고 쿠르릉! 땅을 울리며 지나간다. 휴일 하루에 십여 팀을 보니 모터사이클 족이 많긴 많다. 동료는 저들을 돈 자랑, 과시욕이라고 했다. 인정 욕구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 사회의 풍경이긴 해도 딴 세상 사람 같다는 생각이다. 나와는 물질과 사유에서 삶의 결이 다른 사람들이다.
뉴스를 도배하는 땅 투기와 부동산 정책 등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난 집도 절도 없다. 언제든 떠나면 그만인 리버럴 한 삶이다. 농민도 어부도 아닌 비정규직 기간제는 도시로 치면 일용직 노동자와 닮았다. 기본소득을 담론으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송구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자본이 독식하는 살벌한 사냥터에서 생존 권리는 인민의 것이며, 절체절명의 과제다. 국가는 폭력과 안보의 두 얼굴을 가진 권력이다. 순하고 진실한 얼굴로 바꾸는 건 래디컬 한 인민의 견제와 감시, 끝없는 저항의 힘이다. 역사를 이끌어 온 사람은 이름 없는 인민이었지 소수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점심시간 지나 버스정류장 옆에 의자 펴고 앉았다. 풍혈에서 끼치는 서늘한 바람에 등짝이 금세 시리다. 신나무 가지 타고 늘어진 다래 넝쿨은 등잔불 같은 꽃을 주렁주렁 달았다. 비가 잦아 풀을 베도 며칠 지나면 도로 한 뼘씩 자란다. 초소를 옮기고 두 번째 풀베기를 했다. 그동안 시차를 타고 꽃이 피고 졌다. 봄꽃이 떠난 자리에 여름 꽃이 키를 세운다. 산길 초입의 풀을 베다 새 둥지가 드러났다고 동료가 알려주었다. 보니 콩알보다 조금 큰 새알이 세 개 있었다. 좀 떨어진 풀 위에서 참새보다 작은 어미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부러진 벚나무 가지로 얽기 설기 가려주었다. 어미는 불안한 날개 떨며 둥지에 들락거렸는데 이후로 그쪽은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천적을 피해 맞춤한 장소를 택한 건데 인간의 풀베기로 간섭을 받은 상황이었다.
산림작업단에서 일할 때 산새 둥지를 본 적이 있다. 억새풀을 베어 나가는데 둥지에 알을 품은 어미 새는 떠나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며 떨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주의하라고 하고 얼른 그 자리를 비켜 갔다. 충청도에선 소나무에 둥지 튼 산비둘기를 여러 번 보았다. 나무일 하다 맞닥뜨린 짐승은 많았다. 고라니, 산토끼, 날다람쥐, 고슴도치, 뱀 등 그들이 사는 공간에 인간의 손길이 틈입한 거였다. 금을 긋고 종과 종이 부딪치지 않을 수 있다면 몰라도 인간과 다른 종의 파열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물이나 생명 가진 것을 대상화한다는 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생명 활동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것과 피할 수 있는 걸 가려내는 게 인간의 분별력이라면 이제는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된 느낌이다. 아침 TV에서 들개의 닭장 습격이 나왔다. 들개라고? 이집트 벽화 이후 들개가 있었던가. 현존하는 들개는 아프리카와 호주의 딩고 정도다. 인간과 함께 살다 버려진 개가 들개로 변한 거다. 그들은 몰려다니며 인간의 마을에 대한 적의를 맘껏 드러낸다. 사람은 피해를 걱정하며 들개 퇴치에 골몰한다. 쓰고 버린 쓰레기가, 살다 버린 생명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똥물이 된 강물을 걸러 마시는 인간의 몸은 안녕한지 강은 묻고 있다. 정수기 회사와 생수 회사는 불황을 모른다.
나비 천국이다.
며칠 전부터 우화 한 나비가 직벽 주변을 난다. 마치 울릉도 해안 절벽의 괭이갈매기 떼 같고,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다래 덩굴 때문에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정글 같기도 하다. 하얀 나비와 검정 나비 두 종류인데 이 친구들은 초소 안까지 들어와 영역을 넓힌다. 나풀나풀 눈발처럼 흩날리는 나비를 보니 인생은 호접몽(胡蝶夢)이란 느낌이다. 몸에 좋다고 무인도에서 부화 중인 바닷새 알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 장수와 돈벌이는 쾌락과 행복으로 직결된다는 신앙이다. 믿을 건 돈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의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 땀이 섞인 돈이 아니라 사특함과 교활함이 묻어 있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은 죄가 없다. 욕망은 삶을 살아내게 하는 에너지고 생명의 동력이다. 욕망의 방향이 문제다. 지나친 탐욕과 타인을 대상화하는 욕망은 고통을 낳는다. 그러니까 성실, 부지런, 착하다, 똑똑하다의 개념은 재정립되어야 한다. 애국과 민족주의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배제하는 욕망은 이기성과 혐오에 닿는다. 국가는 애국심을 적절히 이용해서 집단 무의식을 부추긴다.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을 추모하기 전에 전쟁을 해석하는 인식을 가져야 다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으리으리한 전쟁기념관은 희생자의 죽음을 미화함으로써 국가 간 민족 간 집단 무의식을 키운다. 우리 사회에 통일 담론이 힘을 잃어가는 것도 욕망과 관련이 있다. 서로에 대한 정보 부족과 통일, 역사 교육의 부재, 기득권의 공고한 유지는 분단 체제를 견고히 할 뿐이다. 강대국의 틈에서 균형 있는 자립 외교와 진정한 자주국방을 완성하고 체제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경제•문화•여행 등의 자유로운 교류가 이어져 서로를 이해하는 토대와 폭을 넓힌다면, 다음 세대에서 완전 통일도 멀지 않다. 우리는 늘 첫술만 뜨다 얼어붙은 밥상이 된 거였다.
반통일, 반생명의 집단은 누구인가. 반통일•반생명은 거창한 인식을 무기로 무장한 집단이 아니다. 삶의 모든 부면에 걸쳐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하는 삶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그물에 포섭된 인식이다. 그것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지만 삶은 부단히 깨어지고 각성하는 변화와 성장이 속성이다. 그럴진대 우리 안의 개혁과 변화는 반생명• 반통일을 깨는 양분이다. 반생명은 반생태와 맥락이 같다. '소비하는 존재'로서 주체를 자각하는 인간은 태생 자체가 반생명이다. 나를 이루는 허다한 생태의 소멸을 보면 이해가 간다. 생성 성장 사멸의 과정이 존재의 완벽한 상황이라면 제대로 된 존재의 보전을 이루는 게 인간의 의무이고 권리다. 성장의 멈춤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성장의 과정으로 공동체의 지속이 가능하다면 굳이 성장, 발전의 패러다임에 목맬 필요는 없을 거다. 여행의 느낌은 가져가되 쓰레기는 두지 말란 여행지의 팻말처럼 인간의 흔적은 이름도 호랑이 가죽도 아니고 태산 같은 쓰레기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소비에 대한 실천이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할지 모른다. 쓰레기는 산과 강의 오염뿐 아니라 삶의 터전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요인이다. 생활 속의 작은 실천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에 발생하는 쓰레기와의 긴장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잘 쓰고, 잘 버리고, 잘 되쓰는 순환은 공동체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쓰레기를 땅에 묻는 행정은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 포장재를 줄인 상품을 쓰는 것도 방편이다. 글을 쓰면서 부끄러운 건 쓰레기 같은 생각과 소비에서 늘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생명•반통일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운 인식과 실천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생태 보전은 미래가 어둡다. 풍혈에서 나오는 찬기운이 온몸에 끼친다. 건너편 비알 밭에 감자꽃이 소복하게 피었다. 가마솥 같은 불더위에 땀 쏟으며 하지 감자 캤던 적이 언제였는지 가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