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과 트라우마

by 소인

힐링과 트라우마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란 단어의 차이.

스트레스의 사전적 의미는 의학용어로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ㆍ신체적 긴장 상태.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심장병, 위궤양, 고혈압 따위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키기도 하고 불면증, 신경증, 우울증 따위의 심리적 부적응을 나타내기도 한다'이고, 트라우마는 심리 용어로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이며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이다.


뜻을 곱새기면 스트레스는 우리말로 순화해서 긴장, 불안, 짜증이고 트라우마는 인간의 내면에 깊은 흔적이 남은 상처다. 다시 말해서 스트레스는 원인이 되는 요인을 없애면 스트레스는 사라지지만, 트라우마는 씻어내기가 어려운 심리 상태다. 발톱 깎기에 발톱을 다친 개는 수년이 지나도 주인에게 발톱을 맡기지 않는다. 인간의 트라우마는 죽기까지 이어진다. 흔히 쓰는 힐링은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의 치유'이니 범박하게 말하면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을 '힐링한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인간의 삶은 의지든 무의지든 처한 환경 조건에서 스스로의 삶을 이어가는 생명 행위다. 현대인은 개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을 타고난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하는 말이 있다. 하루만 지나도 죽어버리는 정보와 지식은 몰라도 그만일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경우에 따라 죄일 수 있다. 유태인을 처형장으로 보내는 일을 했던 독일 장교 아이히만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평범한 독일의 행정장교로서 상부에서 내린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재판에서 강변했다. 이를 본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했다.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한나 아렌트)

우리에게도 그런 면이 없을까. 비판 의식이 없다는 건 무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의 경우 이차대전 패망 후 미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전범에 대한 처리가 관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헌법을 뜯어고쳐 재무장하려는 현재의 분위기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과 성찰로 이끌지 못한 탓이다.


무사유는 판단과 행위의 오류를 반복한다. 가족과 자신의 안온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게 인생이다. 섭생과 삶의 도락은 누구나 한 번뿐인 삶에서 누릴 가치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개인의 삶과 함께 공동체의 지속 가능을 사유한다. 내가 죽고 나면 망하는 세계가 아니다. 번영과 문화의 향유는 인간이 동물과 변별되는 창조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 무사유의 지점이다. 내 가족, 넓게는 이웃과 공동체, 국가의 틀 안에서의 평화를 얻는 건 일차적이긴 해도 인간 본성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극도의 악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누구나 아이히만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고하기를 멈추면 안 된다고 아렌트는 호소했다. 우리는 인간도 악마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되느냐 악마가 되느냐는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일본의 철학자 야마구치 슈의 말이다. 인간이 처한 시스템은 그의 삶을 좌우한다. 시스템을 공동체나 국가로 환원하면 정치•경제•문화를 아우르는 삶의 조건이다.


페북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점.

사람들의 살아가는 일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여행지, 현실 정치에 대한 바람 같은 일상이 드러난다. 알 수도 있는 사람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벋어나가 덩이째 달려온다. 친구 요청과 수락으로 순식간에 친구가 되거나 삭제 클릭 한 번으로 그 사람과 영영 관계가 끊어진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거든 그의 친구를 보라(不知其人 視其友)'라고 했다. 친구의 친구는 어슷비슷한 상상과 공감으로 모이고 뭉친다. 여기서도 '좋아요'의 공감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든든한 지원군이다. 클릭과 외면은 백지장 차이지만 순간의 선택은 실은 그의 내면의 호불호를 과감하게 드러낸다. 대화나 설득보다는 번득이는 순간의 판단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의 일상에 맞춤한다. 그래서 공허하다. 공허하면서 틈만 나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일껏 페북을 차려놓고 무심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며칠 지나자 그것도 무감해지기 시작한다. 다 그렇게들 사는 거라고 눙친다. 눈앞의 상대와 마주 앉아 삶을 얘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관계보다 '나 여기 있으니 누가 좀 알아주소'란 외침이 무성하다. 인간은 외로울수록 소속감을 원한다. 소외와 배제는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낙오의 살풍경으로 전락한다. 존재감이 자존감이다. 고독한 감정을 즐기는 자야말로 철학적 사유에 가까운 사람이다. 복잡한 사고의 단계를 좋아하지 않는 현대인은 단순한 인정 욕구를 만끽하며 즐기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머리 아픈 화두에 매달리는 치들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떠든다. 태어나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좋은가. 페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그 사람은 능력자다.


삶의 냄새와 온기는 손 안에서 달그락대는 페북이 아니라 볼을 스치는 바람과 햇볕의 온도, 이제 만나러 가는 친구의 마주 잡은 손에서 우러난다. 그 사람의 잘 꾸며진 다듬은 얼굴만 보는 가상의 공간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썩어 문드러진 사회에서 인간다운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사람을 모으고 같은 목소리로 울림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광장의 소란 뒤의 삶은 자신이 맞닥뜨리는 거울과 같다. 아무래도 난 가상의 공간보다 차라리 속엣말을 쏟아내며 취하는 선술집의 연탄 화덕이 제격인 것 같다. 막소금 뿌린 석쇠 위의 꽁치를 뒤집으며 골몰하는 그의 얘기에 귀담는.


바야흐로 힐링의 시대다.

맛집에서 육해공의 진미를 밥상 가득 차려놓고 사진을 찍는 순간 힐링의 세포가 증식한다. 여행지의 황홀한 낙조, 오락실의 만점,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릴 때 힐링은 최고조가 된다. 삶의 도락은 인간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다. 자신의 스트레스나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해 번지점프를 하건 먹방 몰입을 하건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만, 거기엔 소비를 통한 짜증의 해소 외엔 삶에 대한 사유가 빈곤하다. '몰라도 되는' 낮은 온도의 앎은 진부한 삶만 양산한다. 알면 유의미한 것엔 철학과 역사, 문학이 있다. 인문학은 삶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질문이 없는 인생엔 답도 없다. 장자의 도는 무상한 인생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었다. 진부한 삶도 뼈저린 삶도 형해화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게 자연의 순환이다. 아둔한 내 사유는 어디로 처먹은지도 모르게 나잇살만 찌고 사고는 흩어지고 변화와 성장은 오류의 물살을 탈뿐이다. 해거름 스산한 골짜기에서 반성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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