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32)


풍혈 앞에 앉으면 금세 등짝이 시리다. 점심 지나 초소 안에서 삐질삐질 땀 흘리다 의자 들고 나왔다. 머리 들어 하늘 보니 다래 덩굴이 치렁치렁하다. 비 자주 내렸어도 중간에 새는지 강물이 부쩍 줄었다. 두 자급 잉어 두 마리 매일 다리 밑에서 논다. 이름도 지었다. 산등 넘어가며 나무 베는 일 아니고 붕붕 예초기로 개망초 모가지 댕겅댕겅 날리는 일 아니라 편킨 해도 일은 일이다. 매일 도시락 싸서 집 나와 종일 길 위를 지킨다. 한쪽만 보면 가자미 눈 되기 십상이라 하루씩 자리를 바꾼다. 다른 초소에 비해 단속률이 떨어지는 건 도시 간 통로가 아니라서다. 강변 드라이브 코스라 나들이 차량과 라이더, 폭주족이 주로 다닌다. 대별하면 물류 이동, 공사 차량, 여행자다. 주민은 마을 안에서 일하다 가끔 장 보러 나간다. 초소 공터에서 쉬었다 가는 사람도 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유쾌하다. 집 떠나 느릿느릿 유람하는 사람의 얼굴엔 경계하는 빛이 없다. 물색없이 그들에게 말 건다. 여행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물어 오는 길을 알려준다.


오늘도 다리 위에서 릴을 던지는 사람이 보인다. 물에 들어가 루어 캐스팅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제껏 고기 잡은 사람은 딱 한 번 봤다. 갈겨니 한 마리 들고 빙 둘러서서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다 돌아갔다. 능선의 모양이 엎드려 잠든 킹콩 같다. 초록색 털옷을 입은 킹콩은 좀처럼 깰 것 같지 않다. 지진이라도 나면 일어나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화낼 거다. 상상은 자유니 상상을 매일 공기 마시듯 한다. 다리 위의 남자가 이번엔 허리를 잔뜩 구부려 강바닥을 내려다본다. 추락하기 딱 좋은 자세다.


이십 대 무렵 소래 포구에서 망둥어 회를 먹고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엔 목선 두어 척이 뻘 위에서 졸고 있었고 바다로 난 갯물 드나드는 자리에 다리 하나 없이 협궤 열차인 수인선(수원-인천 송도)이 하루 몇 차례 증기를 뿜으며 철교를 오갔다. 짭조름한 갯바람을 술잔에 섞어 알근히 취했는데 더 취한 남자가 비틀대며 철교를 건너는 게 보였다. 남자는 포구를 벗어나 염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광경에 눈을 모으며 술잔을 비웠는데, 두툼한 가을 망둥어 살점을 고추장에 푹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철교 위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퍽 소리 나더니 철교 아래 뻘에 허리까지 빠진 남자가 허우적대며 소리를 질렀다. 손을 저어도 뻘만 잡힐 뿐 몸은 자꾸 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뻘은 거대한 늪이었다. 포구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 아무도 달려가 남자를 구할 엄두를 못 냈다. 짧은 머리의 청년이 번개 같은 동작으로 뛰어갔다.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 잠시 후 둘 다 흙칠이 된 남자가 씩씩거리며 포구로 나왔다. 술 취한 사내는 연신 청년에게 허리를 숙였다. 사람들은 손뼉 치며 좋아했고 우리는 술을 더 시켰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으나 공부보다 배가 고픈 시절이었다. 독한 연애 끝에 남도에 내려가 중선배를 탔다. 출항하고 동지나해에서 고기를 잡고 십여 일만에 돌아오는 뱃길이었다. 얼음 깔린 어창의 갑오징어 갈치 아구서껀 고기를 경매장에 내리고 술집으로 달려갔다. 평소 말 없던 내 또래가 서울 놈, 하며 약 올렸다. 술이 오르자 객기가 발동했다. 술상을 치고 나오라고 했다. 또래는 동그란 눈을 내리고 술병을 잡았다. 술을 따르려던 참이었다. 손날로 술병을 쳤다. 박살난 술병에서 아까운 술이 줄줄 쏟아졌다. 복싱으로 다진 몸이라 피하고 치는 덴 자신 있었으나 나 같은 육지 놈은 쪽수보다 깜냥이 되지 않는 거였다. 한 배의 선원은 거의 선장과 같은 섬 출신이었다. 고참 선원들은 파리 지나간다는 투로 술잔만 꺾는 거였다. 김 빠진 쪽은 나였고 시비 건 친구는 생글거리며 내 어깨를 치며 술을 따라주었다. 이후로도 쪽팔린 순간은 셀 수 없었다. 치기와 독선으로 똘똘 뭉친 이십 대였다.


건설회사에 들어가 노조 활동으로 파업을 주도했다. 육백여 조합원 앞에서 기타 치며 노동가를 가르쳤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숱한 청년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백기완 선생의 시국 강연에서 아내를 만났다. 살림을 시작하고 두 형이 다니던 광고업계로 눈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만났던 동지 모두 눈물겹도록 고맙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광고회사로 옮겨 매체국에서 일했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부르지만 독을 품은 꽃이다. 우리는 산소처럼 광고를 마시며 살고 광고 없이는 껌 한 통도 살 수 없다. 작은 광고 대행사에서는 카피를 쓰기도 했는데 신문에 난 카피를 오려 모은 포트폴리오는 지금도 낡은 살림 어딘가 있을 거다. 이직과 거품이 심한 직급, 연봉에 따라 광고회사를 자주 옮겼다. 제약회사 에이전시의 매체국에 다니다 음주 교통사고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한마디로 쫓겨난 거였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과 정치엔 잼병인 난 조직 부적응자였다. 다시 회사를 옮겼고 직급 연봉도 올랐다. 80년 이후 군사정권이 통폐합한 광고공사와 방송국을 매일같이 들락거렸다. 좋은 사람도 만났고 사기꾼도 만났다. 대기업의 하우스 에이전시가 아닌 독립 광고대행사로선 꽤 높은 빌링을 올렸는데 유명한 라면회사와 세제, 주방 소독제 등을 클라이언트로 두었다. 광고주는 돈을 쥔 황제였고 광고공사는 칼자루를 잡은 왕이었으며 황제와 왕 사이의 대행사 직원은 딸랑대는 종이었다. '질투'와 '모래시계' 광고 시간을 따내고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보지 않았다. 물론 모니터링은 직원에게 맡기고. 민간 방송국 신설 러시에 따라 자고 나면 광고회사가 생겼다. 백오십 개가 넘기도 했다. 중소 광고회사의 연합회장을 맡아 강남에서 양주를 마셨고 충무로 낙지골목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방송사에서 철 따라 개최하는 세미나 등으로 해외여행 바람이 불었다. 세미나는 구실이고 놀자판이었다. 호시절을 누리던 광고업계는 IMF 한파가 몰아치자 얼어붙기 시작했다. 도시적 삶의 주목을 끌어보려던 나의 기믹(gimmick)은 보기 좋게 나가떨어진 셈이었다. 내 손으로 부하직원을 잘랐다. 사표를 내고 시골에 내려가 밥을 벌기 시작했다.


집도 절도 없는 몸으로 밥을 벌기엔 시골은 척박함이 적나라해서 밑창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도 산촌 생활을 흑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로선 상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맛본 다시없는 경험이었다. 묵혀 두었던 시를 꺼내 쓰고 숲 가꾸기 공공근로를 했다. 아연 광산 막장에서 광차를 밀었고 숯가마에서 한겨울에 땀 쏟으며 부장대로 백탄을 꺼냈다. 산림 작업단에 들어가 동해안을 오르내리며 내륙의 산지를 쏘다녔다. 나무 자격증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 커가자 들쑥날쑥한 벌이로는 먹기에 빠듯했다. 시골에 처박힌 고집스러운 성깔을 접어야 했다. 강원도 바닷가에서 수목 관리를 하며 십오 년을 보냈다. 철근을 씹어먹던 입맛이 말랑하게 변했다. 주름이 잡히고 근육은 늘어졌고 민머리(光头)가 되었다. 아이들 발목 굵어져 집 떠나고 머물던 터가 팔리자 자연스레 퇴직했다.


도시 놈이 고향이 있던가. 처가 동네의 낡은 집을 구해 고쳐 살았다. 연고 없는 곳에서의 밥벌이는 여전히 고단했지만 비정규직 일자리는 선심처럼 곳곳에 널려 있다. 정규직은 손대지 않고 코 푸는 세상이 되었다. 열심히 살았으나 여축없는 생활에 돈을 벌어야 했다. 산불 감시원과 휴양림 관리를 했고 감염목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원을 한다. 쉬는 틈틈이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았다. 역사의 꼭지마다 피눈물이 스민 현장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채현국 선생 말마따나 '나이 처먹은 것밖에 없는 한심하게 늙은 것'에 속하지 않기 위해 책 읽고 글 쓴다. 올여름 길 위에서 땀 흘리고 나면 늘어진 뱃살 좀 들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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