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 (42)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는 전면적인 현상이 되었다.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겨울이면 남쪽으로 떠났던 철새가 한반도에 머물러 월동을 하고 점점 텃새가 된다. 국가 간 교역 물량이 늘어나면서 외래 병해충의 발생과 피해가 는다. 주홍날개 꽃매미는 과수에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곤충으로 해마다 피해 면적이 증가한다. 솔잎혹파리와 재선충병은 소나무에 피해를 주는 해충으로 20세기 초에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산업의 발달로 탄소 배출이 늘어나고 쓰레기 발생량의 증가로 지구는 몸살로 신음 중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노력에 비해 성과는 불확실하다. 그린란드에 사는 사람들은 짧은 여름 동안 채소를 길러 먹는다. 기후 변동으로 북극의 빙산이 녹아도 날벌레가 대 발생해도 느긋하다. 다만 걱정하는 건 인간에 의한 인위적인 오염이다. 지구의 나이 135억 년 중에도 수없는 빙하기를 거쳤고, 화산 폭발과 지각 변동을 거쳤는데 고작 인류의 역사 몇만 년에 비할 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연 앞에 태연자약한 그들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작년까지 보이지 않던 내성천의 가마우지는 올봄 처음 나타난 이후 물길을 위아래로 누비며 무리 지어 다닌다. 겨우내 많았던 청둥오리의 개체수는 큰 폭으로 줄었다. 큰 새인 백로, 왜가리는 그대론데 물오리가 사라진다. 가마우지 떼에 밀려난 걸까.
생태중심과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공생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팔당호에 민물가마우지의 피해가 심하다. 가두리 양식장의 물고기를 잡아먹는가 하면 잉어 등 덩치가 큰 물고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물고기를 죄다 잡아먹는다. 오래전부터 내수면 어업 허가를 받아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하나같이 텅 빈 어망을 들어 올리며 울상이다. 게다가 가마우지 떼가 배설하는 똥오줌의 독성에 인근 수목이 말라죽는다. 가마우지는 생태 교란의 주범으로 현상 수배된다. 중국에선 가마우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일본에서는 해마다 만으로 모여드는 돌고래를 창으로 찔러 잡는다. 살코기를 얻기 위해 어촌 마을은 돌고래의 피로 물든다. 인간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을 비교하는 건 무리일 거다. 가마우지는 겨울에 따듯한 기후 조건만 아니라 먹이가 풍부한 한반도에 터전을 잡았지만 먹이가 부족하면 개체는 줄어들고 급기야 이동을 결행할 거다. 천둥, 번개 등의 자연적인 산불로 숲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인간의 간섭이 아니라면 생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와 순환을 반복한다. 짧은 동계 올림픽을 위해 가리왕산의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낸 이후 산에 살았던 나무와 동물은 서식지를 잃고 사라졌다. 인간 중심의 사고는 순간을 위해 기능하고 생태와 자연 중심의 사고는 무엇을 위함이 없다. 천지 불인(天地不仁)이면서 천장지구(天長地久)하다.
생태는 원래 동식물의 차지였다.
산에서 자란 수목은 시간에 따라 천이하며 식생이 변화했다. 동물은 천적에 희생되기도 하고 가뭄과 홍수 등의 변화를 겪으며 개체수를 조절하며 대를 이었다. 아프리카 들소는 가물 때 물을 찾아 수만 마리가 대이동 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강의 악어 떼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자에게 잡아 먹히면서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습성을 이어간다. 절망적인 환경 조건이면 엄청난 수의 들소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우기가 찾아오고 사바나 초원에 풀이 자라면 아프리카 들소는 새끼 치며 번식한다. 오히려 강하고 힘센 사자와 악어 무리에게 절망의 시간은 빠르게 찾아온다. 불행히도 사자는 동물원의 철창에서 대가 끊길지 모른다. 대를 잇는 건 풀을 먹는 들소지 먹이사슬의 상위층인 포식자가 아니다. 인류도 그러하다. 오만과 편견은 인류를 점점 수렁에 빠뜨린다. 어쩌면 인간 종도 멸절을 맞을지 모른다. 초록 행성의 구슬을 갖고 노는 거인이 볼 때 인간종은 독을 뿜어 서로 죽이는 막돼먹은 벌레에 불과하다.
사대강 물을 정화한다고 만든 댐은 물을 가두자마자 녹조와 똥물로 변했다. 상류의 물길은 이미 논과 밭의 퇴비와 비료 농약으로, 골짜기마다 들어선 축사의 배출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윗물이 더러운데 어찌 맑은 아랫물을 바란단 말인가. 상식적인 기초 지식마저 강바닥에 갈앉힌 지난 정권의 몰상식과 무사유에 질릴 지경인데 입때껏 막힌 물길을 열지 않는 처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우리는 큰 것도 작은 것도 바꾸지 못할까.
이동통신업자는 초기 투자비용을 단말기 전화요금에 넣어 자신들의 사업비를 소비자에게 떠넘겼다. 지금은 섬이나 일부 산간 오지를 제외하곤 전국 구석구석 빼곡히 송신탑을 세워놓고도 여전히 통신비 인하는 모르쇠로 외면한다. 요양사 이차 접종 확인증을 병원에서 사무실로 팩스로 보내주면 될 일을 굳이 접종자가 병원에 와서 받아가란다. 데이터베이스가 사통팔달로 깔린 형편의 일처리가 이 모양이니 드는 시간과 비용의 낭비가 얼마나 자심하겠는가. 자기 산에 산양삼을 심으려고 토양 성분 검사를 의뢰했더니 임업 진흥청과 농촌기술센터 두 군데서 하란다. 한 가지 일을 두 데로 나눠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먼 민원인만 오뉴월 땡볕에 발품 팔며 고생한다.
미래학자는 앞으로 없어질 직업과 변화에 대해 지레짐작으로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는' 세상이다. 왜냐면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건 희망 사항일 뿐,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점쟁이에게 문복(問卜)하여 길흉을 점치는 시대는 아닐진대, 인간 중심의 사고를 생태와 인간의 연대적 사고로 옮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멸이냐 공멸이냐의 극한 대립보다 공생을 모색하는 건 인류의 원초적 본능이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의 원리로 공동체가 살아남아 번식, 지속한 것이지 더 강한 자의 DNA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정복 전쟁과 침략을 일삼은 이들은 결국 타 종족에게 동화되었거나 멸절되었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은 위험한 사고다. 다양성은 인정하되 보편적 가치에 견주어볼 때 아닌 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자력 발전, 사대강 개발, 대량생산, 대량소비, 육류의 과다 소비, 온갖 개발과 자연 파괴 행위 등은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한반도 분단 상황의 고착을 바라거나 도모하는 행위도 보편적 기준에서 떨어진 것이다. 분단 체제를 도모하는 진영은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이기성과 무변화의 게으름, 심지어 전쟁을 불사하는 어리석음도 내포한다. 비건을 지향한다고 할 때 단순히 채식주의가 아니라 생태, 동물권, 생명 존중, 평화, 연대 등의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획일적인 이분법의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