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 (295)
다리 앞 할매 집에 갔다.
일주일만의 강변 초소 근무다. 강마을 사람들이 다리 건너 오가며 들여다뵈는 외주물집 할매 네 마당엔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크는 기세가 하도 빨라 중간에 두어 번 말뚝처럼 잘랐는데 다시 움이 올라 자란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마당에 한 뼘의 햇볕도 들어설 틈이 없다. 집 아래 새로 만든 밭에서는 들깨가 힘 좋게 자라고 거름발 약해 키 작은 참깨는 그래도 연분홍 꽃을 올망졸망 달았다. 올봄 근동 현장에 소장으로 일하러 온 둘째 아들이 남는 흙을 부어 경사지를 계단식 밭으로 꾸몄다. 굴삭기 삽으로 꾹꾹 눌러 다져놓은 마사토 밭은 한 번 쏟아진 소나기에 여기저기 물골을 만들었다. 부랴부랴 그물망을 치고 모래주머니 만들어 골마다 흐르는 물길 막아보려 했지만 하늘 뚫린 구멍에서 쏟아붓는 물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올 농사 폐농이든 말든 하늘에 맡기기로 하니 금세 걷힌 하늘처럼 보짱은 편했다. 마당 구석에 접시꽃이 층층이 꽃을 달고 수줍게 서 있다.
마당에 들어서니 할매가 환한 얼굴로 반긴다.
사탕 봉지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아침 출근시간에 쫓겨 마트 지나친 걸 후회한다. 할매는 커피물 올리고 안부를 묻는다. 날씨 얘기, 자식들 배로 강 건너 학교 다니던 얘기 중에 마루 가득 쌓인 감자에 눈이 갔다. 어제 동네 감자밭에서 이삭 주운 거란다. 올해 감자값 헐하고 알도 크다고 했더니 이삭 주워 가란다. 밭주인 어떠냐고 물었다. 촌에선 애써 키운 작물이 값 떨어져 통째로 갈아엎는 일이 허다하다. 주인은 주인대로 생산비도 못 건져 부아 나 눈에서 빨리 사라지도록 엎어버리는 거였다. 어떤 주인은 아까운 농산물 이웃에게 인심이나 쓴다며 가져가라고 통문을 날리기도 한다. 어제 감자 캤는데 상품이 되는 건 반이고 나머진 팔지 못하는 것이라 주워다 반찬 하란 거였다. 수확의 손길이 지나간 밭인데도 두고 간 감자알이 허옇게 덮였다. 김장철엔 무 배추값이 널뛰는 데 따라서 이삭 줍기의 풍경이 달라진다. 배추값이 오르면 우거지용까지 말끔하게 밭 청소하지만 값이 폭락하면 실한 놈만 골라내다 판다. 나머지도 상품만 아니지 김장용으론 손색없다. 어디선가 이삭의 통문이 떨어지면 읍내의 농사 안 짓는 아지매들이 번개처럼 달려와 밭을 훑기 시작한다. 하루만 늦어도 건질 게 없을 정도로 손길이 재빠르다. 어쨌거나 촌에 살면서 소소한 재미라고 해도 애써 농사지은 주인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밭 청소라고 좋을 건 없다. 요즘은 트랙터가 한 번 지나간 자리는 안방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다.
점심 먹고 쉴 시간에 감자밭으로 갔다.
땡볕이 직사하게 두드리는 감자밭엔 하얀 감자알이 우박 알갱이처럼 고랑마다 수북하다. 어제 소나기 내린 탓에 고랑마다 끈적한 진흙이 반죽처럼 들러붙었다. 장화를 꺼내 신고 봉지 들고 밭으로 내려갔다. 밭둑엔 막 꽃을 피운 인동 덤불이 불더위에도 무사하다. 길 건너 초소 뒤 직벽엔 부처손과 돌단풍이 무성한 초록잎으로 성장(盛裝) 중이다. 풍혈 앞에서 얼음 바람을 쐬는 동료가 콩알만 하게 보인다. 강마을 비탈밭에 서니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말간 하늘에선 인정 없는 땡볕이 레이저 광선처럼 찌르는 것 같다. 장갑 낀 손으로 널브러진 감자알을 주워 담았다. 크지도 작지도 그렇다고 팔기엔 모자란 크기의 감자를 속속 던져 넣자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잠깐 동안에 이런데 예전에 산일하던 때는 어떻게 버텼을까 가뭇하다. 살아하는 모든 일이 층위가 있다고 해도 먹고사는 밥벌이란 점에서는 큰 수양이다.
성서엔 농사꾼의 덕목이 나온다.
추수할 때 얌통머리 없이 낱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걷지 말라는 거다. 땅 없고 가난한 과부, 고아, 홀아비를 위해 조금 남겨두라는 거다. 예부터 추수 뒤엔 가난한 사람 심지어 참새, 들쥐까지도 이삭으로 먹고살았다. 구례 운조루에 가면 '타인 능해(他人能解)'라고 쓴 뒤주가 있다. 아무라도 헐어 쌀을 가져가라는 뜻인데 양반 유이주가 빈자의 굶주림을 위해 사랑방 옆에 마련한 거였다. 자존감을 배려해 혹여 쌀을 덜다 눈에 띄지 않도록 배치한 거다. 초겨울 감나무 우듬지에 매달린 까치밥은 공생의 상징이었다. 잘 익은 사과를 골라 쪼는 까치는 사양이지만. 구휼은 공동체의 의무 중 하나였다. 국가 제도 아래 복지의 지출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우리나라는 OECD 평균 복지 비율의 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그런데 복지 비율이 삶의 행복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삶의 만족에 대한 질은 사람마다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기본소득 논의에 슬슬 불을 지피는 형국이다. 경제 규모와 시민의 수준이 균형을 이룰 때다. 인간의 보편적 존엄에 대해 드러내 이의를 달 사람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저것 내세워 반대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는 목숨도 차별하는 무의식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거 때면 지역 따지고 근본 따지지 않는가. 얼마나 내세울 게 없으면 지역 따져 반상을 논하나. 잘난 것들이 나라 말아먹은 건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무지하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다.
사람의 시선에 집착하는 작가를 본 적이 있다
누구나 관종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욕망을 좇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인식과 꿈과 희망에 자신을 대입해 사는 세상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나는 없다고 본다. 주체적인 나로 거듭나고 진정한 내 삶을 살고 싶지만 기존의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는 인식의 확장이 두려운 거다. 그냥 지금처럼 안온한 일상에서 소확행을 즐기다 떠나면 되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사회다. 이기적인 나만 있는 거다. 이타적인 부면은 사회의 상식에 기대 욕먹지 않을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문장, 돌올(突兀)한 이미지의 포착, 지성적인 문체에 몰두하는 그의 주제는 분명 삶인데 삶이 보이지 않는다. 현란한 포장지가 산을 이루고 강을 이뤄 흐른다. 밤마다 꿈을 꾼다. 새해 첫날 중앙지의 신춘문예 란에 자신의 이름이 떡하니 박히고 줄줄이 늘어선 펜 사인회. 영치부의 이름 팔기 저리 가라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가치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내면화하느라 정작 자신은 실종되었다. 걸음이 달리니 지원이 필요하다. 습작을 손대고 산문을 대필하는 사단을 비밀스레 짠다. 사단이라고 해야 점조직으로 할 만큼 교활하고 치밀한 전략이다. 나도 몇 번 써주었다. 지방 일간지에 실린 그의 당선소감에는 평소 그의 입길에 듣도 보도 못한 인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당선 시는 그와 전혀 다른 재료임을 누가 봐도 알 것 같았다. 모티브는 그의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 선언이라기보다 휴대폰 번호를 지우고 모든 그와 관계된 sns를 삭제했다. 잔인한 행위라기보다는 나무토막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라면 쓸모없이 고집만 센 나정도는 못 쓰는 나무토막으로 여겨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나도 누구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다음날부터 날개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고백하면 나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세우기도 버거운데 그와 더불어 인식의 확장에 동참하기엔 나의 국량은 너무 협소한 까닭이었다. 그의 이름은 노트에서 사라졌다. 불운한 조건을 딛고 착하고 어진 사람이 노력하면 잘 사는 세상이라는 흔해빠진 아포리즘에 토가 나온다.
자기 치장에 눈먼 작가나 상품이 되지 못해 뒹구는 감자와의 사이엔 차이가 있다.
공해와 상호부조. 오염된 공기는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 건강하지 못한 병징을 유발한다. 못생기고 자잘한 감자는 누구 네 집에서 훌륭한 먹거리가 되어 밥상에 오른다. 대선 철이다. 선거는 아편과 같아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은 온데간데없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주변에서 추어주고 여론 지지율이 올라가면 슬그머니 욕심이 난다. 어, 이러다 정말 내가 뭐 되는 거 아냐? 슬슬 망둥이가 되어 뛰기 시작한다. 자기 바지 흘러내리는 줄 모르고. 지자체의 선거도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 돈 좀 모았겠다 시골에서 그냥 늙기엔 뭔가 억울하다. 의원 선거에 나가 떡하니 붙으면 의원님 소리 듣잖겠는가. 명예와 권력의 요정이 손짓한다. 봉사하는 자리에 나서는 사람을 보려면 그의 삶을 알면 거개는 보인다. 평소 남을 위한 동정과 배려는 손톱만큼도 없고 자기 과시와 툭하면 싸우려 드는 성정은 봉사직엔 소질 제로다. 그런 위인이 선출직에 나서면 시간이 갈수록 쉰내가 나고 파리가 꼬인다. 손대지 못할 정도로 썩은 떡이 되면 추한 뒤끝을 볼뿐이다. 목민심서를 외고 시민에게 벌벌 기라는 말은 결코 아닌데 적반하장으로 시민을 가르치려 들고 입꼬리가 거만하게 말린다. 정작 의원들이 모여 성토해야 할 뻔한 사안에도 약속한 것처럼 모두 입을 꾹 다문다. 지지리 못난 것들의 동맹이다. 그러니 사람 뽑기 정말 어려운 세상이다. 공동체를 위해 봉사를 하겠다면 먼저 주민들의 불편과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생각'이 우선돼야 한다. 표피적으로 지역 현안을 핥고 명예와 권력에 기댄다면 개인은 개인으로 끝나지만 주민은 오랜 고통에 잠긴다. 진영에 안주하겠다는 건 생각을 하지 않고 열매를 거저 얻으려는 게으름에 다름 아니다. 지역 현안에 대해 늘 불안과 예민함으로 무장한 선량이라야 책임감과 사명감이 유지된다.
감자값이 떨어졌다고 해도 밭에서 뒹구는 감자를 버릴 순 없다.
땅심을 먹고 자라는 것들의 주변에는 흙과 물기만 있는 게 아니다. 비바람과 햇살, 밤으로 은은하게 속삭이는 달빛의 매만짊, 농부의 땀과 노고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등짝이 후줄근히 젖은 채 비탈밭을 내려왔다. 다리 건너다 내려다보니 탁한 물살에도 강 잉어가 물돌을 들추며 강을 거슬러 오른다. 초소 뒤 직벽엔 돌단풍 부처손이 초록으로 반짝이고 두릅나무 이파리가 물결처럼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