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44)


덥다.

일기예보는 다음 주까지 불더위가 절정이다가 서서히 누그러진다고 한다. 상관없다. 더우면 더운 대로 버티는 게 낮게 사는 것들의 형편이다. 에어컨 바람 따라 옮겨 사는 것들이야 더위가 물러가면 에어컨을 끄면 되지만 우리 네는 오르는 기름값 걱정이 앞선다. 더위 다음이 시원함이 아니라 겨울의 추위다. 그만큼 시간은 급행열차처럼 가고 온다.


모자 쓰고 땡볕 속을 걸으니 좀 시원한 느낌이다. 이기자고 들면 이깟 더위쯤이 대수겠냐만 땀은 가슴과 등짝을 적시고 배 밑으로 떨어진다. 얼굴은 물광 낸 피부처럼 번들거린다. 복더위에 마당 개도 입맛 잃고 저녁에 모인 식구도 축 처진다. 에어컨 선풍기 번갈아 돌리고 찬물 뒤집어쓰다 멀거니 드라마를 본다. 기후 변동으로 인한 재해는 지구 곳곳에서 피해를 일으켰다. 그 와중에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이 죽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전향적인 발표가 속속 도착한다. 코비드 확진자 치사율이 독감 치사율에 미치지 못한다면 봉쇄를 이어갈 필요가 없단 결론이다. 코비드를 독감처럼 일상에 안고 가겠다는 선언이다.


나무 실은 차량이 뚝 끊어졌다.

여름 들어서면서 수목 식재 작업이 중단된 탓이다. 가물에 콩 나듯 단속하던 실적도 '이상 없음'으로 채워진다.

형식적이라지만 형식이 필요한 이유는 각성에 있다. 함부로 수목을 이동하는 걸 금함과 함께 소나무류는 반드시 재선충병 무감염을 확인한다는 거다. 소나무를 싣고 가는 트럭을 세우면 하나같이 반출 허가증을 보여준다. 각 요소에 재선충병 무단이동 감시초소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위반을 저지를 사람은 없다. 겨울 오면 화목용 나무를 운반하는 차량이 빈번하다. 신축 가옥에는 화목보일러를 설치해놓은 주택이 많기 때문이다. 기름보일러와 가성비는 맞먹을 거다. 간편한 기름 대신 화목은 토막 내고 쌓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화목용 나무는 참나무가 주종이다. 소나무류는 수지(樹肢) 성분이 있어 그을음이 나고 불땀이 약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수요가 늘어 나뭇 값도 올랐다.


시 되자 하루 중 기온이 정점에 오른다.

선풍기 앞에서도 조끼와 티 안에 땀이 번들댄다. 땀이 나오는 걸 버티는 건 고역이다. 차라리 푹푹 땀 쏟으며 산비탈 풀 베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성정이 지랄 맞아 도 아니면 모였는데 요즘 와서는 뜨물에 뭐 담그듯 멍 때리는 것에 이골이 난다. 블랙커피를 진하게 타 와서 얼음물에 섞어 마시는데 이것도 지금쯤이면 바닥난다. 그러면 매실청을 타 마시거나 얼음물만 마신다. 도시락에 얼음물 양칫물을 넣은 아이스박스가 한 짐이다. 누가 보면 며칠 일하러 가는 줄 알 거다. 끼익! 초소 출입문 앞에 차가 선다. 동료가 반갑게 나간다. 근처에 사는 탁구 동호회 멤버란다. 늘씬한 키에 다리가 긴 반 대머리의 남자가 인사하며 들어선다. 두 사람은 중복 날 복달임 날을 맞추자고 얘기했다. 꼭 복날 아니어도 동료가 쉬는 주말을 맞춰보겠노라 말하며 남자는 탁구 치러 가는 시늉을 하며 읍내 쪽으로 떠났다. 동료가 검은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봉지 안에는 동그란 청호박 여섯 개가 들었다. 집에 갈 때 반씩 나누어 가잔다. 강원도 살 때 우리 집 호박은 늘 동그랬다. 앞집 할머니 네 호박은 기름하게 생겨서 어느 해 할머니 네 호박씨를 심었다. 그런데도 다시 동그란 호박이 열렸다. 땅 때문에 그런가고 나는 지금도 의심한다.


시간을 견디고 돈을 번다는 건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초소 근무의 특성상 한 곳에 머물러 오가는 차를 관찰하는 게 주 업무다. 책을 읽을 순 없지만 잠깐씩 폰을 볼 수 있다. 정말 나무 실은 차는 한눈파는 사이 지나간다. 소나무는 아니었지만 활엽수를 잔뜩 싣고 지나는 차를 몇 번 놓친 적이 있었다. 사오백 미터의 거리를 속도 빠른 차는 순식간에 스쳐간다. 봄부터 이어폰으로 유튜브 강좌를 들었고, 몇 년 묵은 산문을 버리거나 탈고해 정리했다. 휴대폰 메모장으로 간간이 잡문을 썼고 세상 소식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이 평짜리 초소에서 수천수만 킬로 밖의 사정을 살피는 일은 물리적 거리와는 별무 상관인 것이 대상과의 거리란 내적 사유의 확장성 유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개념과 사고로 창의적 사유의 확장을 바라기란 어려운 일이다. 창의적이란 주체적, 자기 중심주의인데 입때껏 자신을 지탱한 사유로는 새로운 세계로의 틈입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헌 옷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의 추위도 따스함도 경이로움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고백과 용기다. 고백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용기는 욕망의 방향을 바로잡아주는 에너지다. 자신을 살아내게 하는 욕망은 삶의 에너지다. 다만 욕망의 방향이 끝까지 안으로 향했는지 안과 밖을 아우르는 건지 변별하는 능력과 추동력이 필요하다.


나는 국량이 협소하고 성정이 강팔라서 남과 사귀기 어렵다. 나이 들수록 견문이 늘수록 신념에 대한 고집이 세져 고독에 빠져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지혜는 멀고 미욱함만 가득하다. 외로움은 자신을 내면을 톺아보는 소중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자칫 고립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 단절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히 다루어야 할 마음의 행위다. 돌아보면 태생의 환경과 몸과 마음의 조건, 교육과 사회화 과정 그리고 많은 인연과 부대끼면서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이 복합 작용을 일으켜 나의 삶을 형성한 결과다. 누구나 살면서 판단해 행동하고 잘못된 행위와 결과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후회한다. 가족과 친구는 관계의 맥락에선 가장 가까운 축에 들지만 난 그들로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부면에선 그런 평가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거나 화해를 요청하기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졌고, 떨어진 지 오래됐다는 느낌이다. 탐진치(貪瞋癡)의 존재인 인간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보면 현재의 나는 고•집(苦•集)에서 머물다 가더라도 내 삶을 살아야겠다는 확신은 변함없다. 살다 보니 살아지고 생각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한 목표는 누구에게도 없다. 삶이 의미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살면서 생기는 의미를 해변에서 조개껍질 줍듯 챙길 일이다. 삶 자체가 의미이므로.


초소 양옆을 줄기차게 걷던 동료는 복달임으로 소고기를 먹으러 갔다. 경기도 고양은 37도까지 오른단 예보다. 퍼붓는 열기 속에서도 벼는 성큼성큼 자란다. 새벽 산책길에 들판에 나서면 까마득한 농약 줄을 풀어 약치는 농부 내외를 본다. 보얀 비말이 공중으로 솟았다가 수평으로 고르게 흩어진다. 키가 고른 벼 포기들이 아침이슬과 섞인 농약에 몸을 씻는다. 꽃 지고 난 자리에 초록 씨방을 단 참깨가 논두렁에 가지런히 섰다. 푹푹 찌는 열기로 곡식은 익고 작물은 자라고 사람은 지친다. 독감의 반열에 들어선 코로나 바이러스는 매일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로 위협하지만 바다는 피서객으로 만원이다. 정부에서 해수욕장을 폐쇄한다면 코로나와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덤프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간다. 집에 돌아가 찬물 쓰고 씻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더위를 버틴다. 염소 뿔도 녹인다는 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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