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297)


정오 지나 초소안은 찜통이 됐다.

점심 먹고 먼저 휴식시간을 채우고 돌아오니 동료는 올림픽 탁구 경기에 빠져 있다. 더운 바람을 토하며 선풍기가 팔랑대며 돌았다. 흐렸던 어제에 비하면 감자 삶을 정도로 푹푹 찐다. 교대하는 동료가 나무 그늘 찾아 떠나자 접이식 의자를 들고 길 건너 스트로브 잣나무 아래에 갔다. 지금부터 초소 안에 머문다는 건 사우나를 하겠다는 뜻이다. 스트로브 잣나무 위로 훌쩍 커버린 아카시나무가 이번엔 잣나무를 압도할 지경이다. 한 달 전 아카시나무를 뒤덮은 등나무 줄기를 낫으로 끊어주었다. 짐을 던 아카시나무가 스트로브 잣나무 우듬지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낭창거린다. 앉자마자 텅빈 돼지 운반트럭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양돈장으로 가는 모양이다. 흙바람이라도 부니 시원했다. 습기 때문인지 어제보다 낮은 기온인데 가슴팍으로 땀이 흐른다. 여름의 한가운데다. 초소 뒤편 낙엽송 숲은 푸른 물감으로 덧칠한 액자 같다. 산자락에 파묻힌 사과 과수원은 풀과 사과나무가 뒤엉켜 멀리선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참깨밭의 참깨는 깨꽃을 달고 한창 씨방을 만드는 중이다. 참깨밭과 붙은 생강밭은 가뭄을 참다 못한 밭 주인이 며칠에 걸쳐 관수시설을 설치했는데 그날 밤 소나기가 쏟아졌다. 노릇하게 타오르던 생강 이파리가 푸릇 싱싱하게 살아났다. 들인 정성이 공으로야 가겠는가. 가물에 목 타던 일꾼들 품값 줘서 좋고 죽어가던 생강 살아나니 좋지 않은가.


집에 돌아가 찬물로 씻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방에 들어가면 선풍기부터 켠다. 방은 불 켜지 않으면 동굴인데 요즘은 숯을 뺀 가마처럼 후끈한 열기가 종일 고여 있다. 뒷집 마당과 계단식으로 연결된 지형이라 손수건만 한 창문을 열어도 뒤란 통해 뒷집 마당이 콧구멍만 하게 보인다. 문과 창을 열어놓아도 바람이 드나들긴 힘들다. 그런데도 겨울엔 창틈으로 송곳 바람이 사정없이 찌르고 파고든다. 작년 겨울엔 성능 좋은 전기장판으로 났다. 바닥은 보일러로 미지근하게 해 놓고 열 빠져나갈 공간 없는 좁은 방 침대 위 이불속이 낙원이었다. 갈수록 자극적인 날씨보다 따스하거나 시원한 게 좋아진다. 더위를 견디는 것도 체력 좋은 젊은 시절의 일이다. 겨울엔 손발 시린 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됐다. 시원한 데를 찾거나 따스한 걸 껴입거나 신고 걸친다. 젊었을 적의 무리는 제어되거나 방어되었지만 이제는 오래가거나 요령부득이다. 무리는 피하고 에둘러 가거나 접는 게 예사다. 발생한 상황 자체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솔직한 자신의 표현이라면 난 참 어렵게 살았다. 내 감정은 세상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고 수습은 언제나 감당할밖에 없는 거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날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음에도 난 그들과 동떨어진 마음으로 살았다. 물과 섞이지 못하는 기름 같은 존재였는데 여자와 세상의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리란 자의식은 종종 과도한 행위를 불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지 나서지 말고 진중하게 중간만 지켰어도 비켜갔을 불운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온 것 같다. 억울하다 거나 불만은 없다. 그런 것들이 나를 형성하고 모루 위의 떡쇠처럼 두들겨 주었으니 말이다. 습속이나 대세를 거스르는 건 이골이 난 정체성처럼 되었지만 그렇다고 한자리에 머문 생각은 없다. 존재란 끊임없이 흔들리고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치는 바람결에 들리는 그대 음성이나 모르는 사람의 숨결,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건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는 외로움 속에 따스한 근원을 품고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서로 돕고 연대하는 상호부조의 DNA가 지구를 지탱할 거라는 가뭇한 희망사항 때문이다. 만에 하나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억울할 건 없다. 생성과 소멸, 자체로 의미는 다하는 것이다.


그늘에서 찐득하게 배어나는 땀을 삭히느라 애쓰기보다. 땡볕 아래 걷는 걸 택하니 땀은 나도 좀 시원해진 기분이다. 뜨뜻미지근한 것보다 양단간에 뚜렷한 구분을 좋아하는 성정은 살아오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부딪쳤다. 그렇다고 언제나 고통을 부른 건 아니다. 때론 고통의 터널을 지나 각성을 얻은 게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의 영웅적 얘기보다 실패한 사람의 무거운 얘기가 곡진하지 않은가. 철저하게 실패해서 수습할 길마저 지워져 버렸다면 그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가. 철학자와 현자의 어떤 아포리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홀로 슬픔을 삭일 일이다. 슬픔과 고통은 순일한 나의 감정에서 섞이고 발효되어 새로운 각성으로 곰삭을 때까지 시간을 견디는 거다. 그게 지금 내가 하는 일상의 덕목이다. 읽는 것보다 중요한 건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쓰면서 나를 지우고 고쳐 쓴다. 어제의 글이 부끄러운 건 오늘의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읽기만 하면 작가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기 쉽고 사유의 시야는 좁아진다. 조금 읽고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뇌가 작동하고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모두 생각인 것은 아니다. 철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의 분석과 비판은 유효하지만 그것을 걸러내고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건 자신의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개인의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항변해도 인류의 생존은 공통의 과제로 다가왔다. 해일이 다가오는데 아무도 깨어나지 않거나 귀담지 않는다.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좀 기다리란다.


다섯 시 되면 사발면 먹고 퇴근한다.

집으로 가지 않고 양조장으로 간다. 원래 계획은 내일 새벽에 술 뺄 예정이었으나 높은 기온 탓에 술이 빨리 익었단다. 아홉 시 넘어 귀가해 씻고 누우면 더위 좀 가실까. 더위 먹은 해 헐떡이며 서쪽 넘어가는데 콸콸 누룩 내 풍기며 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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