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47)

네 시간 가까이 수영하고 왔다.

한 달 동안 매 주말 동해에 다녀왔다. 울진과 망양정에 갔고 삼척 아래 하맹방, 덕산 해변이다. 모래 해변이 형성된 덕산부터 조개 잡이가 가능하다. 폭염이 그칠 줄 모르고 산하를 달구는 날이 한 달 가깝고 팔뚝에 땀이 찐득한 날이 이어진다.


물밑은 잔 고기떼가 몰려다니고 잘피를 닮은 해초와 미역귀가 삭아 유령처럼 흔들리는 수중 여 사이 놀래미 배도라치가 지나다닌다. 팔뚝만 한 숭어가 물 바닥에서 날 보고 유유히 방향을 튼다. 해초가 사라진 물밑은 성게 천지였다. 성게는 갯녹음의 징표다. 해초를 먹고사는 성게가 우세한 곳은 백화현상으로 바위가 허옇고 물고기의 산란과 치어의 생장이 어려워 어장이 형성되지 못한다. 먹이사슬의 단절은 생태 순환의 단절을 뜻한다. 바위에 붙은 고동과 홍합은 여름마다 나 같은 피서객에 몸살을 치르고 살아남은 것만 겨울을 난다. 자연산 홍합인 섭은 자잘한 놈들만 파도를 맞으며 숨을 헐떡인다. 작살질은 관두고 고동과 성게를 잡았다. 집에서 쓰던 집게는 밤송이 같은 성게를 잡기엔 맞춤이었다. 바위에 붙은 놈, 해초를 물고 식사 중인 놈을 집게로 집어 입 큰 그물망에 넣었다.


성게를 잡는 건 이런 식이다. 스노클 대롱을 물고 수면을 떠다니며 물속을 살핀다. 굵은 성게가 보이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돌고래처럼 허리를 폈다 구부리며 자맥질한다. 수심 사오 미터를 오리발을 흔들며 수직으로 내려간다. 성게를 바위에서 떼어 집게로 집는다. 바닥을 차고 위로 올라가면서 그물망에 성게를 넣는다. 조개를 잡을 때도 비슷한 동작을 되풀이한다. 조개 낌새를 보고 자맥질한다. 서늘한 바닥에 내려가면 시야가 또렷해진다. 조개를 파내면서 주변을 살피다 조개가 있으면 남은 호흡을 감안하며 파낸다. 호흡이 모자라면 포기하고 올라와 다시 숨을 마시고 들어간다. 평균 조개 두 개당 한 번의 자맥질이라면 서너 시간에 보통 백 회 이상의 자맥질로 상당한 운동량이다. 코로나 4차 유행으로 닫혔던 실내 수영장이 오픈하면 등록해서 운동할 생각이다. 내 뱃살은 변화할 거다.


물 맑던 예전에는 충주 외곽 농촌의 개울마다 조개가 살았다. 말씹조개는 홍합처럼 생겼는데 잡아서 라면에 넣어 삶아 먹었다. 민물조개는 흔하게 보는 개울 생물이었다. 여름에 놀던 친한 동생의 고향을 겨울에 다시 찾았다. 얼음 언 개울에 가니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함께 간 셋은 썰매를 빌려 경주를 시작했다. 두껍게 언 출발선부터 반환점을 도는 경기였는데 반환점 너머는 얼음이 녹아 물이 흘렀다. 출발 신호와 동시에 신나게 얼음을 지치던 셋 중 둘은 무사히 비틀대며 반환점을 돌았으나 뒤처진 동생은 의욕이 앞선 나머지 반환점을 빠른 속도로 지나쳤다. 우리는 레이스를 멈추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흥미롭게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어어! 동생은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그대로 물속에 처박혔다. 허리까지 잠긴 찬 물에서 나온 동생은 볏단을 태워 불기를 쬐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지금은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 장사하는 동생에겐 미안한 연상이지만 속도를 늦추지 못한 욕망은 인류의 삶과 같아서 일상의 습속과 인식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기후 변동에 따른 지구의 이상 반응은 진행 중이다.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 혹한의 추위가 잦은 횟수로 지구 곳곳을 강타한다. 사라지는 열대우림의 숲 지대, 한반도 세 배 크기의 쓰레기 섬이 떠다니는 대양, 탄소배출과 온실가스로 점점 더워지는 지구는 북극과 남극의 빙하를 녹인다. 농지는 줄어들고 늘어나는 인구수에 비해 식량의 절반은 가축의 사료로 들어가고 후진국의 기아는 절정에 달한다. 부자 나라의 온정으로만 빈국은 일어설 수가 없다. 부패한 정권과 1%의 부자는 원조 물자를 빼돌리고 노동자를 쥐어짜 양극화를 부채질한다. 다국적 기업의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자기 네 땅에서 곡물 경작은 꿈도 못 꾸고 부자들의 기호품을 생산한다. 기아와 혼란은 전쟁을 부르고 생태 파괴로 인한 바이러스의 침투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 성서의 예언이 아니라도 지구는 인간종의 저지레로 죽어간다. 인류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지구 멸절의 시간을 조금 늦추는 것일 뿐, 복원으로서의 치유력은 상실했다. 지금 당장 석탄 발전과 원자력 발전을 끊고 재생에너지인 태양광, 풍력 발전으로 밤을 밝히고, 휘발유 자동차를 폐기하고 전기차를 몰고 육류를 끊고 해산물을 먹지 않을 수 있는가. 쓰레기 제로 운동을 펼치고 재활용률을 끌어올리고 생산과 소비의 패턴을 혁명적으로 바꾼다면 지구의 생존을 늦출지는 모른다. 그러나 욕망의 입맛에 길들여진 사정은 달라 연대적 참여는 불가능하다.


입추 지나니 가을 냄새가 난다.

논에는 드문 하게 팬 이삭이 보인다. 벌레가 붙은 것처럼 오소소 매달린 벼꽃에서 쌀밥을 본다. 보름 전 부지런한 농부가 예초기로 풀을 벤 논두렁 가에 부스스 메꽃이 피었다. 서늘한 아침 꽃을 피웠다가 볕이 뜨거운 한낮엔 봉오릴 다무는 연분홍 치마 색깔의 꽃잎이 처녀의 가슴처럼 부푼다. 인간의 환경에서 연출된 문화와 사상, 예술과 사랑, 삶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진다. 푸른 낙엽송 숲은 여전한데 그 위로 코로나로 죽은 시신을 태우는 영상이 얼비친다. 불타는 주검 사이 한 사내가 달려간다. 지옥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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