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299)


휴무 이틀 후텁한 비가 오락가락했다.

마당은 젖고 지붕에서 모아진 빗물은 가운데에 난 배수구로 콸콸 흘러들었다. 오랜만에 비다운 비 맞은 화단의 나무들은 빗속에서도 생글거리는 표정이다. 첫날 새벽 양조장 알바에서 돌아와 푹 잤다. 정오께 일어나 부스스한 정신으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왔다. 리뷰로 하도 봐서 그런지 익숙한 책 두 권과 노후를 연구했다는 책을 빌렸다. 종일 책 보다 졸리면 그대로 엎어져 자다 하니 허리가 아프다. 실컷 핀둥이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멍 때리는 동안 상상의 에너지는 빛을 발한다.


문자가 왔다.

바닷가 도시에 사는 시인의 문자다.

한동안 sns를 끊고 살아 궁금했는데 그녀는 폰이 바뀌어 주소가 사라졌다며 알려달란다. 새로 낸 비평집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대학에서 강의하며 시와 비평을 쓴다. 이제껏 시집과 산문집, 논문집, 인문 서적 등 활발히 책을 냈다. 책을 낼 때마다 그녀는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그녀의 열정과 끈기에 감탄할 정도다. 나와 카스에서 많은 대화를 나눠 자주 본 사이처럼 느꼈는데 안 본 지가 십 년이 넘었다. 요즘엔 sns와 문자로 안부 나누며 오프라인 대면은 하지 않는 지인이 많다. 각자 생활이 바쁜지라 가끔 안부만 주고받아도 관계 유지는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같은 생활권이라면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겠지만 떨어져 사니 형편껏 체면치레로 관계 유지하는 거다. 그녀는 따듯한 성정과 넓고 날카로운 사유의 품과 깊이를 가졌다. 재작년 남도로 자전거 여행 갔을 때 연락했지만 답이 없었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걱정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러다 정말로 가뭄에 해 비치듯 짧은 문자가 오곤 끝이었다. 보고 싶은 시인이다. 반가운 마음에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일 년 안으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녀에게 내년 초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내가 여성주의에 눈을 뜬 건 그녀로부터였다.

그녀가 보내준 논문집을 읽으며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가부장 사회의 남자로 살아온 삶의 궤적과 의식의 전면에 흐르는 여성에 대한 패러다임이 일시에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글을 쓰면서 생태와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고 리버럴 한 삶을 산다고 자부했던 의식 구조가 얼마나 초라하고 허술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다고 했던가. 이후로도 여러 갈래를 통해 자신을 벼리는 각성을 계속했지만, 그녀가 전해준 거친 바람 같은 전언은 나를 둔한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삶에 흐르는 의식이 궁금했고 긴 시간에 걸쳐 장년에 이르는 변화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미욱한 내 경우만 해도 일 년 전에 쓴 글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인식의 변화는 널을 뛴다. 여전히 새로운 공기를 마시며 걸음마하 듯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모자란 그릇인 걸 어떡하겠는가.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기다린다.

이번에 그녀의 책을 읽으면 감상문을 제대로 써야겠다. 매번 잊지 않고 책을 보내주는 성의에 답해야겠다. 밤 깊어 가고 귀뚜라미는 울음을 그칠 줄 모른다.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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