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54)
우리는 강한 걸 바라는지 모른다.
부조리한 세계를 단번에 확 뜯어고칠 위대한 초인을 기다리는지 모른다. 현실은 늘 고단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라면 차라리 모조리 무너져 사라지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게 낫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 또는 상상의 세계에서 판타스틱한 유토피아를 즐긴다.
영웅의 서사는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유도하지만 뒷만은 늘 쓰다. 왜냐하면 현실은 영웅의 출현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은 고전에 나오는 교훈일 뿐이고 현실은 사악하고 교활한 인간이 권력과 부를 누리며 산다. 전쟁과 혁명을 기대하기는 사회의 부조리는 강철 같이 단단하다. 권력과 부에 치여 노예처럼 사는 대중조차 권력과 부를 욕망한다. 무의식으로 퍼진 패배주의는 현실 순응과 체념의 경지를 요구한다. 얼굴 붉히는 복잡한 얘기와 짜증 나는 상황을 회피하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다스리라는 정신 승리를 노인들이 라디오 캠페인이라고 떠드는 데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돌아가신 채현국 선생이 들었다면 호통치셨을 거다. '씨발 놈들, 그따위로 나이 처먹고 씨부리면 청년들이 뭘 배우냔 말이야!' 노인의 캠페인은 삶의 지혜나 덕담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구조적으로 부조리한 세상에서 굴종적으로 살란 건 희망이 없는 어둠의 전언이다. 자본이 권력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개인은 철저히 자본의 부품으로 존재한다. 그러면서 자본과 권력을 욕망하지만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그들의 삶은 계층을 벗어나 신분 상승의 가능성은 제로다. 신자유주의와 승자독식이 진리처럼 판치는 세상에서 대물림하는 가난 앞에 개인의 저항은 외롭다. 공동체의 안전과 인간다운 삶을 지키고 보전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나 정치는 대중의 기만술에 탁월할 뿐 자신들의 정치에만 골몰한다.
삶의 토대를 부수고 깨는 혁명적 상황이 아니고선 음울한 시대를 헤쳐나가기엔 역부족이다. 그런데도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의 패배주의로 현실 순응의 삶을 살라고 조언하는 노인이라니. 그렇게 자본과 권력에 열정과 몸을 바쳐 얻는 게 굴욕적 삶이라면, 그것에 만족한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얼마나 비루하고 초라할 것인가. 백여 년 전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확대할 때 주된 논리는 차별과 적자생존이었다. 인종과 혈통의 우월의식은 백인의 욕망을 채우는 의식의 바탕이었다.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워 동아시아 제국을 침략했다. 전쟁을 미화하며 약탈과 살육, 강간을 자행하며 그것이 대동아 공영을 이루는 전쟁이라고 민중을 부추겼고, 민중은 국가의 주장을 믿고 따랐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태어났고 아나키즘과 무정부주의가 혁명적 민중 사이에서 싹을 틔우며 자랐다. 인간 존중과 생명, 반전쟁의 목소리는 천황과 군국주의자들의 함성에 모기만 하게 묻히고 말았다. 시대가 변해도 부정과 부패로 자신과 가족을 감싸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재수 없는 사람은 민중의 고발로 실체가 드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대다수의 부패자는 멀쩡하게 살아간다. 그들은 교활한 두뇌로 악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부패와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나 조금은 선량하고 조금은 교활하다. 그러나 계층의 꼭대기에 선 사람은 교활함을 선량으로 위장하는 데 뛰어나다. 영화 'D.P.'에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가해자의 변명은 내면화되어 계층의 갑질을 대변한다. 상대의 고통을 외면한 갑질과 차별은 집단의 암묵적 동의 하에 뿌리를 뻗치고 번성한다. 고통받는 약자에 대한 연대가 갑의 권력 구조를 깨부수는 동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피해 입을까 봐 자신의 이익을 뺏길까 봐 연대를 외면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한히 위대하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친구를 간단히 배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약자는 사라지고 잉태되고 갑질의 유전형질은 질긴 생명을 이어간다.
인간은 다양한 세계의 다양한 부면에서 완벽하게 적응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사람의 인생이 백 년이라면 그동안 경험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다. 그래서 프로이센의 명 재상 비스마르크는 "어리석은 자는 경험에서 배우고 현자는 역사에서 배운다"라고 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자신의 처지를 직관하면 한숨만 나오더라도 현실 긍정의 힘으로 살아내려면 수도자의 탁월한 도의 경지에 들어서야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한 조건의 사람들 모두가 득도할 순 없다. 불운을 상쇄하는 유한한 생명의 유의미를 독하게 성찰하는 건 사람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다르다. 앎의 확장은 세계의 확장이다. 자기 세계가 확장된다면 삶의 선택지와 인생을 즐길 선택지가 그만큼 다양해진다는 의미다. 불운과 행운의 해석도 다양해진다. 마냥 불운에 슬퍼하지도 운 좋음에 기뻐 취하지도 않는다. 인생을 풍성하게 살고 싶다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
쉬는 날 일찍 시내 나가 대장암 내시경 검진 예약하려다 포기했다.
안내보다 병원의 관행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간호사에게 질렸다. 내가 더 살거나 갑자기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얼마 전 새로 사둔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발이 아팠다. 신발 상자를 찾아 포장해 동료에게 주었다. 동료는 아내가 좋아할 거라며 고마워했다. 열 시를 기다려 문을 연 매장에 들어가 신발을 샀다. 전에 내 발 사이즈는 260이었는데, 이젠 265 아니면 270이다. 265는 딱 맞고 270은 조금 헐렁하다. 나이 들수록 옷이나 신발이 약간 큰 게 편하다. 생각도 남을 가르치거나 타이르기보다 헐렁하게 하는 게 좋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생각을 게을리하면 쪽박도 얻지 못한다. 쪽박은 비움의 상태로 채운다는 꿈이나마 있다. 생각이나 발을 너무 조이면 건강에 나쁘다. 재빨리 헐렁한 신발로 바꿔 신고 다이소 매장에 갔다. 동료가 부러워하던 뚜껑 있는 스테인리스 컵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며 타 간 커피를 홀짝였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찾으며 로비에서 하는 압화(press flower) 체험하며 책갈피를 만들었다. 체험 강사는 '젤 특이한 책갈피'라며 추켜주었다. 추첨을 통해 접이식 방수 돗자리도 받았다. 돗자리는 도서관에서 부러 나눠주려고 꾸민 이벤트 같다. 내가 '다시 또!'를 뽑아 다시 뽑으니 정말로 돗자리를 주었다. 시골 병원에서 진단용 분변 통을 받고 마트에 들러 냉동 건조된 필렛 형의 미역국과 북엇국을 샀다. 초소에서 버너로 물만 끓이면 겨울철 점심 도시락의 따뜻한 국거리가 될 것이다. 채현국 선생은 생전에 일으킨 사업을 부정한 독재정권에 협조하기 싫어서 종업원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떠났다. 선생은 이런 말도 했다. "농경 시대 노인의 경험은 지혜가 되었는데, 지금의 경험은 다 고정관념이고 틀린 말이 되었다" 태극기 부대 노인들을 보고는 "저런 노인네들의 꼬라지를 잘 봐 두어라, 노력하고 살지 않으면 너희도 저 꼴이 된다"라고. 선생은 리영희 선생 등 어려운 민주 인사들에게 집을 사주거나 수배된 인물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또한 "돈 버는 게 악이 아니고 돈 버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게 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