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55)
시골 소읍에서 오두막 수준의 집을 고쳐 사는 놈에게 부동산 뉴스는 남의 세상 얘기다.
나뿐 아니라 농촌에서 번듯한 전원주택이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도시의 수준과는 천지 차이다. 서울의 강북 지역 아파트 하나만 처분해 내려와도 시골에선 부자다. 시골 부자라고 해봐야 서울에 아파트 한 채 가진 사람과의 비교는 어림없다. 그래서 시골사람들은 도시의 부동산 얘기를 들으면 허탈해진다. 과연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인가 의문이 든다. 죽자고 땅 갈아 농사 잘되어도 태풍과 가뭄 등 천재의 걱정이 태산이고 농산물 시세가 널 뛰면 밭째 갈아엎는 일이 다반사다. 농촌에서 존경받고 안정된 직업은 교사와 공무원이다. 세상 뒤집어져도 선생과 살림꾼은 있어야겠기에 그들은 철밥통이다. 죽어라 아이들 가르치지만 선생과 공무원 되는 자식은 드물다. 자영업자와 농부는 사장이면서 시장에 민감하다. 나머지 땅도 가게도 고정 직업도 없는 이들은 기간제 노동자다. 시간제 단기 알바와 지자체의 기간제 노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축없는 밥벌이를 하는 그들의 꿈은 최저시급은 찔끔 올라도 지금 하는 일이 끊기지 않기만을 바란다. 도시 사람처럼 자고 나면 땅값 집값이 껑충 뛰는 건 바라지 못해도 함께 사는 가족이 큰 병 걸리지 않고 무탈히 사는 게 큰 복이고 행운이란 생각이다. 낮게 산다고 속악한 욕망 없으란 법 없지만 태어난 목숨 큰탈 없이 보존하다 가는 게 꿈이지 싶다. 그들에게 공평하단 것은 때마다 돌아오는 선거철 투표권이 유일하다. 농사철엔 벌레처럼 꼬물꼬물 움직이며 흙을 뒤집고 약 치고 수확하는 별 거 아니게 보았던 농민에게 선거철만큼은 대접받는 시절이다. 평소엔 입꼬리 올리며 거만하던 의원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겸손해진다. 한 일이 없을수록 미안해하고 겸손해진다. 표만 주면 발바닥이라도 핥아줄 기세다. '니기미, 편케 살도록 해달랬지 가락엿 빨아달라켔나'.
데구치 하루아키(出口治明)의 책을 읽다 마당에서 따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개를 데리고 나선다. 도서관에 가면 많은 번역서가 있는데 그중에서 미국, 일본 작가의 책이 많다. 특히 가까운 나라 일본의 서적이 마치 대유행처럼 꾸준히 번역되어 쏟아져 들어온다. 가벼운 인생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이 주종인데 읽다 보면 일본인들의 자잘한 심리와 성찰을 엿보게 된다. 그러나 글 중에서 뼈저리게 전쟁의 역사를 반성하거나 뉘우치는 글은 과문한 탓인지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의 체험이나 기억을 마치 자신들이 당한 사건처럼 일반화해서 기술하거나 전쟁에 의한 피해의 고통을 자국민과 타국인을 통째로 해서 사유하는 데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어떻게 된 뇌 구조이길래 가해의 사건을 일반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지 섬뜩한 느낌이다. 20세기 초반 유행했던 일본 사소설(私小說)을 읽는 느낌이 든다. 하긴 그런 심리의 물결을 타고 이광수 서정주 등은 피해 민족의 기대를 간단하게 외면하고 입신에 성공했다. 인간의 신념이 얼마나 나약한 기반에 기초하는지는 '역사가 그럴 줄 몰랐다'는 그들의 변명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들이 사랑을 말하고 인간의 내면을 얘기할 때마다 인간의 위대함에 깊은 의구심과 의혹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인간 존중에 기반한 일본인의 반전과 식민지 독립의 협력 관계는 드물었지만 눈물겹도록 뜨거웠다. 역사는 숱한 인간 전형의 관계를 생산하고 소멸하며 흘러간다.
소읍을 남쪽으로 빠져나가다 부석 방향의 샛길을 탄다.
항아리를 만들었던 독점 마을을 지나 부석면으로 가는 들판은 누렇게 익은 벼가 정오의 햇볕에 금빛으로 출렁인다. 자박하게 흐르는 개울 가의 아카시나무와 벚나무 가로수는 가시박이 뒤덮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등칡을 밀어내고 점령한 가시박은 왕성한 덩굴손을 뻗어 모든 수목의 모가지를 감아 죽인다. 소를 키우고 논농사 밭농사 과수원 일에 바쁜 주민은 가시박 등칡쯤이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석축을 쌓아 직선으로 긁어낸 개울 바닥, 물고기가 사라진 개울은 홍수 방지용으로 설계되어 해마다 콘크리트로 제방을 쌓는다. 시멘트 독으로 돌 밑에 숨은 물고기가 허옇게 배를 뒤집고 죽는다. 사라진 생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능률과 생산성 외에는 돈벌이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생태 보전, 환경오염 이런 거 생각할 틈이 없다. 고향 떠난 자식들, 도시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환경 미화에 팔 걷고 나설 사람도 없다. 그나마 예전과 달라진 건 공공근로 노인 일자리 덕에 농촌 마을길에 쓰레기가 줄었다는 거다. '진리 질서 화합'이란 구호로 바른생활 운동본부에서 건 현수막이 펄럭인다. 진리 질서 화합이란 말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힌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진리는 무엇이며 질서와 화합은 누구의 무엇을 위한 일체의 단합인가. 군사 독재의 찌꺼기가 묻어 나온다. 인간 삶에 '바른생활'이란 과연 존재하는 양식인가. 공동체의 습속이 오늘의 시대 의식에도 여전히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바른생활을 외치고 나라에 충성, 국민을 위한다는 국회의원 관료는 가물에 콩 나듯 하고 비리 혐의로 감방에 가거나 사퇴하는 말로를 자주 본다. 아직도 운 좋게 자리를 지키는 놈들 중엔 끼리끼리의 카르텔이 견고한 상급 도적이 많다. 이런 것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는 희망이 제로다. 갈수록 썩은 내만 난다.
집은 오두막이라도 내 집이 편하다.
집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휴식과 교육의 공간이다.
과거의 집은 땔감과 식량이 있고 가족의 사랑이 있으면 절대 안식처였다. 수신제가를 기초로 입신양명하는 과거제도는 철저히 양반, 그중에서도 적자에게만 적용되는 신분상승 제도였으나 어쨌거나 집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바람과 비, 추위를 막아주었으며 외부로 나아가는 충전 장소로서의 구실을 하는 공간이었다. 고통스러운 결핍과 끊이지 않는 불화가 생산되는 집은 탈출해서 다른 세계를 찾는 것이 시급한 위험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집이 언제나 안전과 사랑의 공간이 되는 건 아니다. 집의 구성원에 따라 가해와 피해,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도사린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집과 고향은 때때로 등가적 가치를 지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누군가에게는 그립고 돌아가고픈 추억의 장소이지만 누구에겐 떠올리기도 싫은 모멸과 고통의 장소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향 쪽으로는 오줌 누기도 싫은 거다. 집이 상처고 두려움인 사람에게 아무리 평화로운 집, 사랑의 가족 해봐야 고통만 새살처럼 돋아난다.
인간의 흔한 착각 중의 하나는 상식을 오해해서 아무 상황에나 대입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는 점이다. 영림단 시절 산에서 나무를 벨 때 백 그루나 천 그루나 백 가지 천 가지의 다른 상황이 존재한다는 걸 기억하고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길 때도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라는 일반화의 오류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상식은 뭉뚱그린 상황이 아닌 천 가지 상황의 천 가지 상식이 적용되는 것이다. 상식은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상식이다. 그러니 상식이라고 타인에게 함부로 강요해선 곤란하다. 우리는 상식 선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상식 밖의 테두리에서 대화와 공감으로 언제든 상식 안과 밖을 넘나드는 존재다. 대화 소통 공감으로 연대를 이루지 못한 사회가 어쩌면 큰 탈 없이 굴러갈 수 있다. 화합하지 못해 자잘한 불화가 끊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민주 사회는 그래서 늘 어수선하다. 고요한 평화는 억압이 잠긴 허방한 사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뭐라도 해서 말썽이 나야 바른 길을 모색한다. 화합과 연대를 이룬 척하면서 위선으로 호들갑 떠는 질서 정연한 사회는 오래가지 못하거나 속으로 곪는다.
김장철엔 숯불에 올릴 고기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만 있으면 상이 꽉 찬다.
이 때는 무도 달고 맛있다. 친구를 불러도 좋고 가까이 사는 친지를 불러 함께 앉아 입 크게 벌리고 쌈을 해도 좋다. 먹고살기 바빠 자주 모이지 못하는 것도 잘 산다고 하기엔 모자라다. 평소의 오해나 묵은 감정을 씻기엔 밥보다 더한 건 없다. 누구든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 정성껏 차린 음식에는 사심이 틈탈 여지가 없다. '지적 확장의 즐거움에 빠져 산다'는 이를 본다. '나는 바보'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다. 일 중독에 빠져 돈 버는 재미에 골몰해 삶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앎이 협소해 선택지가 좁아터졌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고 기억나는 문장이 없다면 안 읽은 거나 마찬가지다.
요약과 리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책은 내 것이 된다. 지식을 쌓기만 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책 많이 읽은 바보가 된다. 진정한 앎은 의심과 질문을 거쳐 사색을 통해 자기 것이 된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사회는 질문과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어리석은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믿어버리면 편하기 때문이다. 진영의 논리에 빠지면 상대의 잘하는 건 안 보이고 내 편의 못한 건 덮어버리기 일쑤다. 그런 자세로는 삶의 성장과 변화를 도모하기 힘들다. 평생 보험회사 직원을 하다 말년에 보험회사를 차려 성공하고 나중에 대학 총장이 된 데구치 하루아키(出口治明)는 질문과 의심을 게을리하는 건 생각하기 싫어하는 정체된 삶이라고 했다. 그는 일생을 통해 배우는 방법을 세 가지 꼽았는데, 책이 50%고 사람이 25%, 그리고 여행이 25%라고 했다. 여행은 낯선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인식을 가지는 행위다. 책을 읽고도 변화가 없다면 차라리 땅을 뒤집어 농사를 짓는 게 낫다. 건강한 흙은 농부 하나만큼은 건강하게 만든다.
내가 집을 떠나 살고 싶은 건 관계의 새로운 모색이다.
삼십여 년 살다 보니 진부와 구태의연, 흔해 빠진 가족 관계에 몰두한 느낌이다. 잘살았다는 게 아니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관계는 묵은 감정의 앙금이 차고 넘칠 지경이 되었다. 어쩌면 인정하지 않는 이상 해결되는 문제란 없다. 해결이 사건 이전 상태로의 복구라면 말이다. 부부 사이라면 이혼하거나 별거, 졸혼을 말하는 세상이지만 그런 건 외려 성가시고(사회적 관계의 이미지 때문이다. 한마디로 쪽팔리다는 것이다. 사회는 결혼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을 결함의 혐의로 본다.) 건강한 관계의 복원을 위해 잠시 떨어져 살고 싶을 뿐이다. 복원까진 아니더라도 서로 미워하지 말기를 바란다. 고인 물처럼 탁해진 가족의 공기와 마찬가지로 내가 사는 주변 일상의 침체된 공기를 갈아 마시고 싶은 생각도 있다. 강원도 바닷가에서 경북 내륙으로 들어와 산 지 오 년 동안의 생활은 벽에 고정된 액자 같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틈틈이 독서로 출구를 찾았으나 뻔한 관계의 풍경과 흔해빠진 대화는 사유의 새살을 돋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잠깐씩 여행을 했지만 돌아오면 매번 같은 자리, 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간제 노동, 휴식, 기간제 일자리, 휴식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이 들고 피부는 빛을 잃고 근육은 탄력이 바래 주름이 늘어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두려운 건 생각의 정체였다. 남들과 닮은 습속과 생각으로 사는 건 싫은 일이다. 그렇다고 탁월한 사고나 뛰어난 능력을 바란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하루를 살아도 자율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일상에선 걸리고 간섭하는 통념의 그물이 촘촘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낯선 바람이 부는 곳에서 잠시 살고 싶을 뿐이다. 누구는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역시 집이 제일 안온하단 걸 느낄 거라고 신앙처럼 말한다. 왜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통념을 내게 오염시킬까. 누구나 자신의 중심적 가치와 삶이 있는데 그걸 강조해서 뭣한단 말인가. 안온한 일상에서 그대는 얼마나 유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지 묻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그도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니까. 사람들은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라고 퉁친다. 비슷하게 닮은 것 같아도 분명히 개인의 사고와 세계관에 따라 인생은 수십 억 가지다. 적어도 난 타인의 욕망을 살고 싶진 않다.
꿈이라면 한 곳에서 사계절을 느끼는 일 년을 살고 이동한다. 앞으로 얼마나 낯선 곳의 공기를 마실 수 있을까.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서 배울 수 있을까. 가족과 기꺼운 만남을 가질 수 있을까.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익숙한 편안함에 잠긴단 말인가.
잘 사는 사람일수록 오래 사는 건 정설이 되었다. 부자는 하나뿐인 목숨이 안타깝다. 수시로 개인 건강검진으로 몸을 관리한다. 국가가 하는 건강검진은 믿지 못한다. 대다수 인민은 건강검진을 감사히 받는다. 힘들게 일하며 소주와 담배 연기로 위안 삼는 인민에게 개인 돈으로 건강검진은 먼 얘기다. 그래도 나라가 고맙다. 미국 같으면 꿈도 못 꿀 의료보험이라 병원 출입도 잦다. 하지만 암에 걸리면 반짝 치료받다 떠날 각오는 해야 한다. 그래도 나라가 고맙다. 예전엔 병명도 모르고 세상 뜬 부모 쌨었다. 그나마 내가 어떤 병으로 죽는지는 안다. 그래도 먼 나라 얘기인 땅값 집값 얘긴 속상하다. 도시로 떠난 아들이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도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한 말도 이해할 만하다. 집이 본래의 집 아니고 불어나는 돈이 된 세상에서 집을 장만하는 목표는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연애도 사랑도 결혼도 2세도 사치가 된 사회는 사람이 살만 한 세상이 아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전직 대통령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고 다시 전직 대통령이 하나 둘 감방에 갇힌 사회가 정상인가. 인민은 멍하니 딴 세상 돈잔치 구경하고 고단한 몸 일으켜 일하러 나가는 좆도 아닌 팔자가 제대로 된 세상인가.
출근길 시간이 남아 길가에 차 대고 '뉴스 공장' 듣는데 곱게 단풍 든 들깨밭에서 머리 허연 사내가 깻잎을 따고 있다. 가을 깻잎장아찌는 내가 즐기는 음식의 하나다. 어제 새벽 산책길에서 키 큰 노인과 말다툼했다. 잠깐 풀어준 개가 노인에게 다가가자 지팡이를 휘둘러 개가 짖었다. 미안해서 얼른 줄을 채우려는데 입이 험하다. 입이 험한 건 나도 못지않다.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노인 같았다. 그의 형편없는 말을 들으며 초라하단 생각이 들었다. 노인일수록 말도 조심해야 한다. 말미에 그는 서로 조심하자고 했다. 나도 미안함을 표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노인이다. 오늘은 충혼탑으로 갔다. 사정을 알 리 없는 개는 마냥 신났다. 점점 산책 공간이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