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찬

by 소인

두찬(杜撰)


두찬은 시가나 문장에 잘못이 많음을 뜻하는 말이다. 두묵(杜默)이 시를 지으면 언제나 율격에서 벗어난 것 뿐이었으므로, 사물이 일정한 격식에 맞지 않음을 '두찬'이라 일컫게 되었다. 두묵은 원나라 때 유명한 사람이다.


직설적으로 문장의 오류를 뜻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사람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덕지덕지 걸치고 사는가. 오류란 그릇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거지만, 그릇됨과 이치는 누가 정하고 따르게 되었나. 이치는 시대 상황에 맞는 인식과 그에 따른 행위 규범일 것이다. 인류는 시대에 따라 삶의 양식과 공감을 버무려 상식과 문화를 일구었다. 앞서가는 사람은 '두찬'을 무릅쓰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어느 때에는 앞선 이의 생각이 시대의 이치로 둔갑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빼면 고정된 진리 체계는 없다는 말이 된다. 변화하고 뒤집히며 성장하는 것이 인간의 인식 체계이며 공동체가 옳다고 믿는 가치는 무시로 옷을 갈아입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삶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 누구의 삶이든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뜻만은 아니다. 삶에 해서는 안될 생각과 행위는 존재하는 법이다. 문제는 용어나 인식의 문제를 자기만의 해석으로 독점하려는 데서 발생한다.


공정과 상식을 화두처럼 끌고 다니는 대선 후보의 낯판을 보면 소름이 돋는 것도 그 까닭이다. 마치 전체 시민의 생각을 대변하듯이 뇌까리지만 실은 그들만의 권력 카르텔에 국한된 협소한 가치를 읊조리는 데 불과하다. 다수의 시민은 그것만(공정과 상식) 해결되면 일상의 모든 문제가 풀리고 잘살게 될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또는 내 편의 잘못이나 오류는 상대의 과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이기주의와 맹신에 빠진 집단 무의식에 도취되어 내 편이 아니면 찢어 죽여도 좋다는 혐오의 싹이 무성하다. 집단 지성은 설 자리가 없다. 이래서는 공동체의 두찬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고 함께 무너진다. 모 아니면 도라든가 못 먹는 감을 밟아 문지르는 건 공동체의 지속성에 똥물을 끼얹는 저지레밖에 안된다. 우리 사회는 전쟁과 찢어지게 가난한 시대의 강을 건너 선진국으로 들어섰다. 몸이 커진 아이에게 몸에 맞는 입성을 입히고 새신을 신긴 꼴인데, 의식은 과거의 전쟁과 가난의 공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자본 축적이다. 한껏 쌓아놓은 부와 거머쥔 권력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자는 욕망이 불어났다. 가만있어도 자고 나면 땅값, 집값이 오른다. 공정과 상식을 좇지만 내심 미소를 감추고 표정 관리하는 게 교양과 지성이다. 사회의 지성은 이미 죽었다.


추억은 과거의 인식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질 정도로 위대하지만, 용렬함과 비루한 섭세의 가치를 동시에 지닌 존재다. 독서를 하고 삶을 궁구 하는 자세로 사유하지만 현실의 비루한 꿈은 외면할 수 없다. 뜻은 높은데 발은 자꾸 헛디딘다. 속리를 손가락질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속리의 물살을 타는 것이 부조리한 인간 존재다. 자, 이제 어찌 살 것인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문을 두드린다. 먼길을 앞두고 밥상을 차리는 그대여 무엇을 고르는가.



구매력과 용도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비와 목적에 맞는 행위는 모두 정당한 걸까.

차별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자격지심이나 열패감이 아니라 그대로 드러나는 걸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하면서 또 한 번 차별 의식을 부추기거나 조장한다. 참 끈질기고 더러운 발상이다.

구매력과 용도에서 용도를 빼면 구매력만 남는다.

용도는 삶의 행위다. 용도는 삶의 의지와 욕망에 기인해 삶을 삶답게 만든다. 욕망은 방향의 문제일 뿐, 삶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에너지다. 자신의 목적은 인간답게 사는 일이고 이를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한다. 구매력은 자본이 좌우한다.

자본의 능력이 곧 자신의 능력이라 믿는 사람은 자본을 신앙처럼 숭배한다. 물신교 성직자의 서열이 매겨진다. 서열은 차별의 위계다.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본래는 누구나 평등했으나 권력은 층층이 계급의 질서를 꾸며 지배하기를 좋아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능력이 되지 않으면 낮은 사랑을 하고, 한 끼의 식사에 곰팡이 핀 빵에 값싼 버터 발라 먹고 배부르면 된다. 만족은 스스로의 기준인데 인간의 능력 중 하나는 행복의 조건에 여타의 물질이나 능력에 차별을 두지 않는 거다. 그런 사고의 능력이 없는 것들이 물질을 기준으로 교양을 뒤발하며 차별 의식을 품는다. 체화된 의식은 지층의 두께와 같아서 화석처럼 굳어져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육이 오염되어 오염된 채로 살다 떠난다. 나도 나의 오염된 정신을 모두 다스리진 못한다. 부패하지 않게 새로운 공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을 뿐이다.



수영


유튜브로 수영을 배운다.

위드 코로나임에도 강습은 멈췄다. 생활 수영 강사, 국가대표 선수, 대표팀 감독 등 일급 강사들이 수영을 강의한다. 대가는 디테일에 있다. 선수 급의 강의를 보다 대가의 강의를 보면 몸의 구조와 동작의 디테일에 대한 원리가 쏙쏙 들어온다. 그저 호흡하고 팔 돌리고 발을 차는 게 아니라 몸의 구조에 적합한 움직임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수영을 배운다. 하루아침에 실력이 는다면 누구나 국가대표가 되겠지만 소질과 운동신경에 따라 능력의 차이가 있다. 매일 조금씩 몸으로 느끼면서 나가는 수영이 재미있다.


소금쟁이는 물 위에서 표면장력을 이용해 미끄러져 간다. 인간은 물속에서 중력과 싸우며 부력을 이용해 물의 저항을 견디고 떠오르려 한다. 중력을 이기는 건 팔다리의 동작이다. 효과적인 동작으로 물을 거스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가만히 보면 앞으로 나가는 데 머리조차 물의 저항을 받는다. 뱃머리가 물살을 가르며 항해하는 모습이다. 엄밀히 말해 자유형은 옆으로 나아가는 영법이다.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머리를 옆으로 돌리거나 물속에 잠긴 채 수영한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몸통과 팔이다. 정면으로 물과 부딪치기보다 옆으로 틀어 매끄러운 유선형을 유지한다. 물고기의 모습이다. 팔을 뻗어 글라이딩하면서 몸통을 좌우로 부드럽게 돌려 롤링하는 거다. 발차기는 수면 바로 아래에서 차는 게 효과적이다. 박태환의 자유형 동작을 보면 별로 움직임이 없는데도 죽죽 미끄러져 나간다. 개울에서 송사리의 노는 모습이나 방어, 돌고래의 움직임을 보면 꼬리지느러미를 한 번 툭 치는데도 순식간에 물살을 가른다. 자유형 선수가 옆으로 가듯이 물고기 몸체는 대개 측편(側偏)이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최소화한다. 바닷가에 살면서 스노클 장비를 하고 바닷속을 유영하는 일은 경이롭고 즐거웠다. 십오 년이 지나는 동안 바닷속은 폐허가 되었고 물고기 해조류 조개는 점점 사라졌다. 인간은 생태종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종이란 걸 물속에서 알게 되었다.



‘가슴 아프지만 대단하지 않은 존재’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자’ 앨리스의 모험을 다룬, 연극 ‘지하 6층 앨리스’가 공연 중이다. 코로나 이후 사회에서 보이지 않던 노동자의 역할이 드러났다. 청소 노동자, 택배 노동자, 의료 노동자, 돌봄 노동자는 그림자처럼 실체가 보이지 않던 계층이었다. 비대면 사회에서 거대한 조직이 굴러가는 톱니바퀴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다. 하루만이라도 쓰레기가 치워지지 않는다면, 늦은 밤 일하다 배가 고플 때 야식을 갖다 주는 이가 없다면, 아픈데 돌보는 이가 없다면 사회는 어떤 상태가 될까. 사회에 필요한 노동을 하면서도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에 대해 사회는 '가슴 아프지만 대단하지 않은 존재'로 넘겨버린다. 공감은 어떤 이들에게는 싸워야 할 권리가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딱 거기까지다. 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비싼 아파트 놀이터를 침범했다고 협박하는 노인과 이를 민망하게 여기는 주민의 틈에는 정말 아무 차별이 없는 걸까. 농부, 어부와 함께 식탁에 오르는 채소와 생선, 공장 제품에는 외국인 노동자의 고된 노동이 스며 있다. 그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정책과 시선은 어떤가. 불법 체류자를 양산하는 외국인 노동자 정책과 이를 교활하게 이용하는 기업주의 행태는 닮아 있다. 모든 계층의 의식에는 차별이라는 딱지가 도사린다. 대법관 출신 다독가가 독서는 '거짓으로의 도피'가 아닌 '거짓으로부터의 도피'라고 콕 집어 말했다. 거짓으로부터 도피한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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