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307)
겨울이 온다.
건듯 부는 상수리나무 이파리가 끈질기게 매달려 찬 바람을 견딘다. 떨어진 마른 잎은 서걱대는 소리를 내며 구른다. 마른풀을 헤치고 산길을 걸으면 발아래 낙엽 밟히는 소리 요란하다. 마치 아우성치는 소리 같다. 몸이 으깨지고 정신마저 혼미한 마른 잎의 아우성이 마치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심장을 뚝뚝 분지르는 소리 같다. 간밤의 서리는 들판을 하얗게 물들이고 아침 햇발에 몸을 녹인다. 빈 들에 누군가 묶어 세운 볏짚이 오종종 모여 추위에 떨고 있다. 초겨울 아침 풍경은 따스함과 냉혹함이 섞였다. 조금 전 지나온 읍내에는 출근하는 차량이 누렁소처럼 허연 김을 토하며 바쁘게 오갔다. 일과가 되다시피 한 출근길 과수원 앞에서의 쉼이다. 흔한 사과 한 알 남지 않은 사과나무 우듬지에 마지막 이파리가 떨고 있다. 빈 과수원 옆에서 바람소리에 귀담고 있다.
삶은 잔잔한 감동과 즐거움과 우울을 버무린 채 마른 강물처럼 실오라기 같은 물길을 내며 흘러간다. 얼마큼 아름답고 눈물겨운 인연들이 모여 날실을 풀어 누군가의 옷을 짠다. 손길이 모여 사랑을 일구고 입김을 누벼 촘촘한 삶의 무늬를 이룬다. 매일 이른 새벽 개와 함께 충혼탑에 올라가 어둠에 잠긴 읍내의 불빛을 내려다본다. 자잘한 삶의 무늬가 모여 물결을 이루고 생을 이끈다. 때로 욕망과 애증에 들떠 밤 깊도록 잠 설치거나 하루를 감사히 살았다는 안도와 뒤설레는 꿈을 품고 잠자리에 들 거다. 오래전 세상 떠난 시인의 집이 성냥갑만 한 지붕들 사이로 보인다. 돌보는 이 없어 시인의 집은 해가 갈수록 낡아진다. 칠이 벗겨진 기와는 버짐 핀 까칠한 피부를 닮았고 마당의 나무는 멋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군다. 살아 뜨거웠던 시인의 기억이 점점 멀어진다. 살다가 추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인연은 또 얼마나 많으냐. 부러 잊고 싶었던 얼굴 또한 얼마나 많았으랴. 가슴을 때렸던 진한 고백은 잊힌 기억이 되어 어딘가로 가버렸다. 충혼탑에는 한국 전쟁과 윌남전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름을 돌에 새겼다. 이념을 떠나 총알이 튀던 전장에서 뜨거운 삶을 살다 간 이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개와 함께 나타난 사내가 그들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다. 한여름 무성한 잎을 뽐내며 그늘을 만들었던 느티나무는 초겨울 새벽 입성 한 겹 걸치지 않고 우람한 근육질의 몸피로 바람을 맞고 섰다. '변함없음'의 변화는 관찰과 사유를 통해 드러난다. 나무의 변화는 삶의 변화와 닮았다. 나도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낡아 간다.
영하 4도.
지구 온난화로 예전의 추위는 자취를 감췄다. 익숙해져선지 조금만 기온이 떨어져도 목을 움츠리고 옷을 껴입는다. 미래 학자와 기후 학자는 음울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전망을 말한다. 자본주의 이백여 년 동안 지구는 빠르게 달라졌다. 생산과 소비의 주축은 지구의 자원을 물 쓰듯 썼고 명을 다한 것들은 소리 소문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계절의 변화와 뭍과 바다의 자원과 생명을 예사롭게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지 모른다. 당연히 여겼던 습속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당혹과 충격에 빠질 거다. 생산과 소비, 삶의 양식과 의식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을 거다. 패러다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반도의 사람들은 지옥에 가서도 부동산 투기에 날밤 샐지도 모른다.
사람이 목석이 아닌 담에야 수시로 벌어지는 감정을 제어하기는 불감당이다. 국량이 좁은 속인의 경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미욱하기 짝이 없다. 살다 보면 석불(石佛)도 반면(反面)하는 경우와 수없이 부딪친다. 가족 관계에서 상황은 더 심각하다. 날 선 언어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관계의 복원이란 요원할지 몰라도 떨어져 지내는 게 낫다. 지구의 별에서 만난 상대를 가여운 존재라 여기며 배려와 인정으로 보듬는 게 낫다고 여긴다. 틈이 벌어지는 건 나의 인식 속으로 상대를 강요할 때다. 또한 타인의 삶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할수록 현실의 위치는 흔들리게 된다. 이치는 간단하다. 돈을 벌 수 없는 시간만큼 인생을 즐기면 된다. 삶은 얼마나 풍요롭게 살았는가 보다. 얼마나 풍성하게 살았는가의 문제다. 섭세의 속리에 빠질수록 의미는 얇은 외피의 속살을 드러낸다. 누구나 초라하다면 초라함을 지니고 살면 된다. 부러 꾸미거나 감추거나 하면 할수록 삶은 부박해진다.
호흡을 또 놓쳤다.
처음 호흡법을 익혔을 때(익혔다고 생각했을 때) 수영이 되었다. 자신감을 얻었고 25미터 레인을 머리를 내놓고 숨을 마시고 머리를 집어넣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미끄러져 갔다. 언제부턴가 숨이 찼다. 75미터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도로 오십 미터가 되었다. 유튜브를 검색했다. 호흡법을 바꿨다. 이번엔 호흡에 신경 쓰느라 팔다리가 따로 놀았다. 어떤 때는 발차기하는 걸 잊고 허우적댔다. 발을 물에 넣고 화난 사람처럼 팔을 홰홰 휘두르며 공기를 마셨다. 새로운 숨 뱉기와 마시기가 좀 되자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수영은 한 시간으로 정했다.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하기로 한 건대 실은 한 시간이 넘으면 수영이 지겨워졌다. 아마 수영장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면 종일 놀았을 거다. 어쨌거나 호흡을 놓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중에 좀씩 나아가고 있단 증거다. 빨대를 쓰는 여자에게 동작에 도움이 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유난히 튀어나온 턱을 치켜올리며 과장되게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차 목표는 완벽 자유형과 평영이다. 접영은 흉내 냈더니 왼쪽 어깨가 금세 알아챘다. 배영은 급하면 하면 될 일이다. 자유형과 평영을 떼고 내 몸에 맞는 영법을 개발할 생각이다. 횡영은 제일 자신 있는 영법이다. 팔을 자유형으로 하든 평영 영법으로 하고 발을 차든 밀어내든 호흡이 된다면 모두 가능한 수영이 된다. 개헤엄도 생존 수영으론 최적의 영법이다. 구조를 기다린다면 송장 헤엄으로 누운 채 팔다리만 휘젓고 있어도 그만이다.
휴무 이틀 째.
아홉 시 반에 수영장에 갔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데 나이 든 사내가 수영장은 처음이라며 쭈뼛쭈뼛 말을 건다. 얘들이 사 보냈다며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을 늘어놓는다. 하고 싶으면 자기가 살 일이지 자식에 떠밀려 운동하러 나왔단 얘긴가. 촌사람의 은근한 자식 자랑이란 걸 짐작한다. 그는 날더러 귀농했냐고 묻는다. 이 지역서 본 적 없는 얼굴이란다. 수영 좀 하셨냐고 물었다. m면 강에서 좀 했다며 어깨를 추어 보였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사내에게 친절히 수영장에 대해 말해주었다. 예상대로 그는 머리를 내놓고 팔을 휘익 저으며 헤엄쳤다. 어릴 적 그가 강에서 멱 감을 때 발밑에서 팔뚝만 한 강고기가 따라 헤엄쳤을 거다. 노을 지는 강가에서 팔팔 끓는 매운탕 마시며 불콰한 눈에 비친 강은 어땠을까. 다른 레인의 아지매들이 사내의 수영을 보고 수군거린다. 머리를 내놓는 영법은 수상 인명구조사의 전형적인 영법이다. 아무렴 어떠랴. 평생 흙 뒤집어 일군 사내가 수영 강습을 받았을 리 없다. 촌에 실내 수영장이 생기자 대처 사는 자식이 아버지 운동 좀 하라고 수영복서껀 일습을 챙겨 보낸 거다. 그는 이따금 개헤엄도 치며 레인을 몇 번 오가다 구석 의자에 앉아 쉬는 중이다. 자기보다 연배인 듯한 노인이 물에 몸을 담그더니 느릿느릿 평영을 시작하는 모습을 멀거니 본다. 내가 영법을 바꿔 가며 레인을 오가던 중 그는 소심한 꺽지처럼 물 바위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