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미친바람이 초소 양철 지붕을 물어뜯는다.
거두지 않은 밭의 검정 비닐이 만장처럼 이리저리 나부끼다 아카시나무에 걸리고 개울 건너 신작로에 떨어진다. 돌돌 말린 비닐이 빈 밭을 맴도는 게 까마귀 떼 같다. 신갈나무 밤나무 마른 잎사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날아간다. 죽죽 뻗은 낙엽송이 흔들거린다. 아침에 0도였다가 해 뜨자 영하로 떨어졌다. 기온이 우물에 처박히는 두레박 같다. 시베리아 상층의 -30도 찬바람이 반도를 쓸고 내려오는 모양이다. 바람이 몰고 온 추위는 모든 걸 꽁꽁 얼릴 기세다. 매일같이 경운기 몰고 산기슭 사과나무 과수원에 가던 청년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거의 매일 나와 사과나무를 베어내고 묘목 심은 땅을 다졌다. 하루는 굴삭기를 얻어 층층이 과수원을 긁어내 편평하게 만들었다. 베어낸 나무는 경운기에 싣고 집으로 가져갔는데 그는 봄부터 겨울까지 오백 평이 안 되는 과수원에 몸과 정신을 쏟아붓는 듯했다. 나는 제발 주렁주렁 붉은 사과보다 흙을 찍던 삽날에 누런 금덩이가 달려 나오길 기도했다.
오늘 저녁 수영장에 숏핀을 가져가기로 했다. 동작 교정을 위해서다. 발차기 근력 강화를 위해서 쓰지 않기로 했는데 다리가 아프니 맘껏 저을 수 없어 쓰기로 했다. 나이 들어 수영이 만만치 않다. 왼 어깨 인대 수술에 아킬레스건 수술, 오른쪽 오금의 신경에 붙은 혹이 날 끌어당긴다. 팔다리 성치 않으니 예전의 근력이 아니다. 울퉁불퉁한 근육은 바라지 않는다. 지구력 단련일 뿐이다. 물에 저항하며 팔다리 움직여 나아가는 동작은 원시 인간의 본능을 일깨운다. 인류는 얼마나 많은 자연과의 대치에서 강을 건너고 바다를 헤엄쳤을까. 프라이데이는 금요일에 로빈슨 크루소가 살던 섬에 헤엄쳐 가서 그를 만났다. 원시 형태의 수영이 free style, 크롤 영법의 자유형이다. 한반도에선 개헤엄(dog-paddle)이 유행했다. 어제 수영하다가 느꼈는데 의식하지 않아도 코로 숨을 뱉고 입으로 마시는 동작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는 거다. 몸에 편한 동작이 제일 좋은 동작이다. 호흡은 걸림돌이 아니게 됐다. 상급 호흡으로의 연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반복 연습을 했을 때 나타나는 릴랙스 한 무긴장의 상태는 또 다른 희열을 느끼게 한다.
장면 2
오리발 파워를 실감했다.
영하의 추위를 뚫고 간 실내 수영장엔 사람이 드물었다. 나올 때는 두 명이 남았다. 물에 들어가 숏핀을 신었다. 지난여름 삼척에 조개 잡으러 가고 오 개월만이다. 오리발 신은 지도 십오 년이 됐다. 그동안 바꾼 것만 네 번이다. 그만큼 오리발은 몸에 붙은 발처럼 익숙하다. 수면 아래에서 발목을 놀려 천천히 저어도 쉭쉭 나아간다. 동작에 여유가 생긴다. 스트롴하며 머리를 반쯤 내밀고 숨 마시는 데에 여유가 붙는다. 금세 25미터 벽에 닿는다. 롤링도 여유가 생겼다. 몇 바퀴 돌다 숨을 릴랙스 하게 마시고 뱉었다가 잠영을 했다. 잠영은 멘털이 중요하다. 숨이 남았는데 뇌는 이산화탄소 농도를 섣불리 판단해 떠오르라고 부추긴다. 조급한 심정으로 풀(pull)과 킥을 거듭하니 벽에 닿았다. 핀 덕분에 최초 25m 잠영(潛泳) 성공이다. 숨의 여유가 있었는데도 몸은 조급하다. 그래서 잠영은 멘털 스포츠다. 50미터 욕심이 난다. 조금씩 서서히 오르기로 한다. 잠영은 두 번 했다. 자유형 동작을 계속 연습했다. 시계를 보는데 어제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리발 사용법을 가르쳐줄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그른 모양이다.
바다를 상상한다.
동해에서 주로 물질을 했다. 멀리는 필리핀 팔라우 산호초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팔뚝만 한 열대어가 가까이 와서 누군가 들여다보고 달아난다. 녀석들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함께 유영했다. 보루네오 섬에서는 사납게 일어나는 파도를 만나 돌아섰다. 동해에서는 조개를 캐고 작살로 노래미를 잡았다. 운 좋은 날은 문어 멍게 전복을 잡았다. 문어를 삶으니 술 취한 내 머리처럼 불그레했다. 큰 놈은 이웃과 갈라 먹었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갯것도 차츰 줄어들고 유입된 민물로 바닷속은 백화현상이 심했다. 수초는 썩고 고기는 딴 데로 옮겨갔다. 영법을 익히고 open water에서 free swimming을 오래도록 하는 상상을 한다. 소금쟁이처럼 물 위를 미끄러지며 대양을 누빈 들 수면 위겠지만 인간은 심연을 모르고도 한 세상을 살아간다. 마치 떠다니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믿고 유아독존의 자기 중심주의를 펼치며 거리를 활보한다. 보리수나무 아래 싯달타는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물속은 그의 손바닥에 있었으니 말이다. 토사곽란이 그의 열반 원인이라니 아이러니하다. 나고 감은 필연의 과정이니 깨닮을 얻은 그로서도 막긴 어려웠을 터다. 내가 수영하는 건 저항의 몸짓과 닮았다. 몸을 움직여 부력을 일으키고 끌어당기는 중력에 저항하는 동작이 속리(俗理)의 습속에 저항하는 것과 닮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모든 세상 이치를 탈속하려 하지만 죽음을 초월할 순 없다. 종교는 그럴 때 필요한 약이다. 나는 약을 거부하지만 나약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다. 미세먼지 같은 감정의 변화에 휘둘리고 이해와 오해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sns를 하면서 친구를 수없이 버렸다. 비우고 나니 홀가분한 느낌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친구도 나를 끊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해와 이해는 음식 같으면서 독이 들었다. 함부로 이해했다고 오해한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삶은 이해와 오해를 거듭하다 끝난다. 나를 이해하는 분들이여,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대양에 떠다니는 소금쟁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도 아니면 세상에 발 헛디뎌 물에 빠진 닭(落汤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