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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Dec 25. 2021

잡문

杂文(309)


그럭저럭 준비는 끝났다.

이삿짐이라야 옷과 담요와 주방기구 등속이다.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수저 그릇 등을 챙겼다. 남도는 따듯하니 담요 깔고 겨울 침낭에 들어가면 후끈하리라. 쌀과 부식은 내려가서 사고 다이소에 가서 자잘한 살림을 살 생각이다. 놀러 가는 거 아니니 스노클 장비와 텐트, 통발과 투망은 두고 간다. 수영복은 가져간다. 기간제 일이 종료되면 경기도 지인 집에 엔진톱 들고 가 담장의 향나무 세 그루 중 가운에 한 그루 베어주고 내려간다. 친구 몇의 sns를 끊었다. 서운켔지만 어쩔 수 없다. 당분간 혼자 없는 듯 살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초소 근무 십 개월 동안 동료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인생 일 년 중에 오랫동안 한 사람과 머리를 맞대고 도시락을 먹은 경험도 별로 없지 싶다. 서로의 내장 깊은 곳의 상처를 꺼내 보여주기도 하고 과거의 오르가슴을 소환해 함께 즐거워했다. 난 그에게 스마트폰 앱 까는 법, 사진 캡처하는 방법, 메모장 쓰기, 몰디브 앱을 다운로드하여 사진에 글씨 넣기와 친구 숨기기 친구 끊기 등을 알려주었는데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곧잘 익혔다. 실은 나도 스마트폰 기능 중 몇 가지밖에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동료에게 다 알려준 것 같다. 마지막엔 백신 QR코드 흔들기 기능을 딸에게 배워 알려주었다. 그는 휴무일 탁구장에 출입할 때 또래의 친구들 앞에서 자랑스레 흔든다고 했다. 나도 저녁에 수영장 갈 때 냉기 품은 어둠 속에서 흔들어댄다. 우리는 살면서 내게 필요한 것들은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 바뀐 시대에 살려면 롯데리아에서 키오스크 사용법을 알아야 배를 채우고 폰뱅킹도 익혀 써야 발품을 줄인다. 시골의 농협 창구엔 노인들만 붐빈다. 폰뱅킹을 못하니 골짜기서 걷고 버스 타고 읍내 나와 은행일을 보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답답하면 창구 아가씨에게 통장을 덥석 맡기고 처분을 기다린다. 시대가 바뀌니 노인들이 고달프다.


도시와 다르게 농촌은 계절의 변화를 주변의 풍경에서 느낀다.

도시도 가로수와 화분에서 꽃 피고 지는 감각을 느끼지만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공간의 계절감과 이곳은 사정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철마다 날아와 우는 새소리, 죽은 것 같은 마른 가지에서 참새 혓바닥 같은 여린 연초록 싹이 나오고 개울의 물빛도 계절마다 다르다. 겨울엔 찌꺼기가 가라앉아 투명하다가 여름 들어 기온이 오르면 부유물이 섞인 탁한 물이 흐른다. 중태기 피라미가 물살을 오르내리며 벌레를 잡고 새벽 계곡엔 밤새 놀던 수달과 담비, 고라니가 물기를 털고 집에 갈 채비를 한다. 부지런한 농부는 경칩이 오면 밭을 뒤집고 촉 오른 고추씨를 돌본다. 산야가 초록으로 뒤덮인 여름 지나면 2•7 내성 장바닥의 물산도 밥 익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동해 푸른 바다를 건너온 비릿한 생선이 붉은 갓과 입맛을 쿡쿡 찌르고 겨울의 길목에 선 사람들의 입성도 두터워진다.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낸 이의 얼굴에 짧은 햇살이 추억처럼 머물다 저문다.


자연의 순환은 늘 그랬던 것처럼 가고 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어제의 네가 오늘의 너와 다르고 지난봄의 나무와 가을의 나무가 다르다. 사랑도 변하고 삶도 바뀌어 죽음이 된다. 선인이 깨달았던 날카로운 통찰은 무딘 칼이 된다. 지겹게도 일상은 좀처럼 그대로인 것 같고 진부하게 보이지만 무언가 달라도 달라진다. 변화의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입이 찢어지는 하품으로 눈물을 빼지만 변화의 결을 간파한 이는 삶이 물리지 않는다. 희망 속에서 절망을 읽고 절망 속에서 꿈을 본다. 남들 다 품는 희망이란 도락에서 떨어져 순수한 절망의 직조를 거친 빛을 느낀다. 그 빛은 산란하여 산하에 온기를 뿌리기도 서늘한 비를 내리기도 한다. 과거에는 필요했던 일이 현재는 전혀 기억조차 가물하다. 새로운 변화의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사유에도 구습(舊習)이 있고 게으른 사유가 있다. 외연과 내포의 차이를 읽지 못하면 허겁지겁 눈앞의 욕망을 희망으로 착각한다. 인류는 수많은 단어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밝은 면을 지향하는 단어에 무비판적으로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양과 음, 정상 비정상으로 가르려는 이분법적 사고가 제일 위태롭다. 다양성이 차별로 읽히기도 하는 착종된 세태 인식은 싸늘한 냉소주의의 삶을 이끌기도 한다. '좋은 것'이라고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다. 순종의 미덕은 굴종과 닮았다. 반항하지 않고 자라는 생명은 없다. 추위를 견디고 더위를 버티고 비바람을 맞고 나서야 열매는 익는다. 사물의 순환이 이러한데 사람은 양지와 좋은 것만 좇는다. 순치(馴致)된 짐승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인간종은 동물종의 일부였다. 만물의 영장이니 생각하는 동물이니 하는 오만이 생태와 자연의 순환을 망가뜨렸다. 앞으로의 시간은 그 오만의 결과를 받아내는 시간이다.


불온한 생각과 행위를 더듬는다.

불온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간 혁명가는 없었다. 속인도 그렇다. 습속은 안락하고 평화롭지만 파문(波紋)을 일으키지 않고 일상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 인식의 확장이고 삶의 지각(地殼)을 뚫는 변혁의 실천 행위다. 역사도 정치도 그렇게 이어져 왔다. 구습을 버리지 못하면 퇴보를 거듭할 뿐이다.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나는 지성인도 아니면서 흉내 낸다.


동료는 길을 걷다가도 잽싸게 차로 달려와 계량컵에 오줌을 눈다.

오줌발이 약해 찾아간 비뇨기과에서 이차 병원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겨가며 검사를 받았고 수술을 앞두고 있다. 시간 별로 눈 오줌의 양을 체크해 병원에 제출한다. 수술 전 CT, MRI를 찍고 심전도 검사를 한단다. 전신 마취니 자다 깨면 신체의 일부는 떨어져 나갔을 거라며 웃는 그의 입속이 허허롭다. 회복이 빨리 되어 다음 파수의 초소 근무 신청에 지장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덩달아 시원찮은 나의 오줌발을 염려한다. 수술을 하고 나면 관계는 가능해도 사정을 할 수 없단다. 사정이 없는 섹스란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남자는 사정이 절정이다. 그는 사는 동안 원 없이 해봤으니 더한 욕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의 표정에서 마른 강바닥이 떠올랐다. 허연 뱃바닥이 드러난 개울에서 사금 덩어리가 왕창 쏟아졌으면 좋겠다. 그의 말년이 평안하길 빈다.


기타를 두고 갈까 했지만 안고 가기로 했다.

빈 방 홀로 밥 끓이고 책 뒤적이다 보면 왕 심심해 미칠지도 모른다. 시인 이상은 농촌의 초록 일색에서 삶의 '권태'를 느꼈지만 현대인은 심심한 권태를 못 견뎌한다. 무언가 저지르지 않으면 자신의 페르소나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초조함에 sns를 두드리고 술을 마시고 쾌락에 탐닉한다. 선인은 자연을 읊조리는 신선놀음으로 세상의 먼지를 떨어냈다. 그렇다고 합목적으로 삶을 꾸린다는 것은 정신 건강에 조급함만 끼친다. 꿈이 없이 살아간다는 청년이라고 나쁘지 않다. 좋고 나쁜 건 기준이 아니다. 꿈 희망이 없어도 삶을 살아낸다는 건 소중하다. 길에 구르는 돌이라고 함부로 찰 수 없다. 사물, 생명 가진 것이나 존재 그대로 혁명이다. 바람에 쓸리고 햇살에 닳아 쇠잔한 존재여도 모습 그대로 형형한 존재다. 어제는 Lou Christie가 1973년에 발표한 'Saddle the wind' 가사를 외웠다. 하남석이 '바람에 실려'로 불러 히트한 곡이다. 직역이 무방할 정도로 나의 형편에 들어맞는 노래다. 퇴근하고 수영장 가기 전 기타로 조금 쳤다. 잠영(潛泳)으로 25미터를 가면서 가사를 떠올렸다. 집에 돌아와서 두어 번 기타 치고 다음날 새벽 산책하면서 흥얼거렸다. 남도 바닷가에서 부르리라 생각했다. 허옇게 서리 내린 빈 밭을 개와 함께 오르는데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났다. 가슴 한편에 물기가 돋아났다.


Saddle the wind


Lou Christie


It's my dream to see the world

and fly like a bird on the wind

to be free from the cares of the world

and never go home again


Saddle the wind

I'd like to saddle the wind

and ride to wherever you are

and you'll smile and cry and welcome me

Oh my darling that's how it's gonna be


:Saddle the wind

I'd like to saddle the wind

and ride and ride till I'm by your side

and you'll laugh and cry and welcome me

Oh my darling that's how it's gonna be




바람에 실려


내 꿈은 세상을 보는 것이죠

바람에 실려 나는 새처럼

이 세상의 근심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리고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바람을 타고

나는 바람을 타고 날고 싶어요.

당신이 있는 곳까지

그리고 당신은 웃음과 눈물로 나를 반기겠지

오, 내 사랑 그렇게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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