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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Dec 30. 2021

잡문

杂文(310)


노인은 매일 자전거를 탄다.

추우나 더우나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느릿느릿 자전거를 탄다. 올해 구십이 된 노인은 특무상사로 제대를 했다는데 지금도 서리가 하얗게 앉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닌다. 살집 좋은 꼬장한 등짝은 얼핏 보면 칠십 대로 보인다. 아침 출근길에서 그가 길 위를 오가는 게 보이는데 종일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면 소재지까지 왔다 갔다 한다. 그는 불퉁스런 구석이 있어 인사를 해도 여간해서 반응이 없다. 처음 초소 근무를 하면서 그와 마주쳐 두어 번 인사를 했으나 부러 먼산을 쳐다보길래 다음부턴 내가 그를 외면했다. 무뚝뚝한 사람에게 굳이 안면을 틀 이유 없으니까. 동료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내를 사촌 형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무슨 사단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딸이 부쳐주는 반찬으로 밥 끓이고 혼자 산다는 거였다. 길 위아래 밭이 있어 여름엔 경운기를 몰고 지나기도 한다. 동무가 있는지 없는지 그는 종일 자전거를 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초소 앞을 지난다. 초소에서 오십 미터 떨어진 속도제한 표지판이 있는 곳에 자전거를 세우고 아래 논에 내려가 오줌을 누는 게 노인의 버릇이다. 땅딸한 체구의 노인은 물건을 흔들고 지퍼를 올린 다음 자전거에 올라 길 위로 느릿느릿 페달을 밟는다. 전쟁을 치르고 아내를 잃은 그의 세월은 어떠할까 궁금하다.


청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에 나와 일한다. 오백 평이 되지 않은 사과나무 과수원에서 봄부터 겨울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초겨울엔 열흘 넘게 사과나무를 베어냈다. 수종 변경을 하려는 진 몰라도 그는 베어낸 나무를 경운기에 싣고 집으로 가거나 윗마을로 날랐다. 옆 골짜기 밭에 있는 농막에 부려놓기도 했다. 말똥가리가 하늘을 선회하는 요즘엔 논에서 볏짚을 모은다. 그는 남의 일도 하는데 아마 남의 논이지 싶다. 동료는 여름에 경운기 뒤에 아내와 어린 딸을 태우고 밭으로 가는 그의 식구를 본 적 있다고 했다. 동네 노인의 논두렁 풀을 베어주고 품삯을 받는다고도 했다.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청년은 마치 과수원에서 금이라도 캐듯이 집요하게 일했다. 오늘도 찬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논에서 볏짚을 묶는 중이다. 나는 정말 흙을 뒤집는 그의 삽날에 금이 쏟아지길 빌었다.


소나무 재선충병을 감시하는 초소는 고정된 감옥 같은 위치라 내다보는 풍경이 제한돼 있다.

마을은 떨어졌고 길가의 집 두 채와 논밭, 청년의 산자락 과수원이 전부다. 한 집은 여자가 혼자 사는데 농사철엔 인근 면의 오라비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머무느라 통 얼굴을 보지 못한다. 담장 너머 반송이 벌어진 어깨로 집을 감싸고 담 밖으로 향나무 주목이 기름하게 심어져 있어 마치 수목으로 둘러싸인 성 같다. 개울 다리 건너 한 집은 내외가 사는데 봄부터 길 양쪽의 밭을 오가며 개미처럼 일한다. 동료는 작년 가을에 말리는 고추를 고르는 아내가 지나는 남편의 엉덩이를 툭툭 치는 걸 봤다며 금슬이 좋은 부부라고 했다. 남편이 이것저것 하느라 대출받아 빚이 많다는데 아직 팔팔한 근력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좀 떨어진 마을이라곤 해도 버스 정류장 뒤편의 댓 집이 전부이고 전부 홀로 사는 할매 가구다. 키 작고 똥똥한 할매는 우리에게 고생한다며 음료수와 과자를 자주 건넨다. 농촌은 서로 기대며 사는 사람들이 조금씩 늙으며 풍경을 도맡는다.


동지가 지나도 해는 짧다.

오후 다섯 시 반이 되면 사위는 어둠에 잠긴다. 전조등을 켜고 달려오는 차에 나무가 실렸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섯 시 퇴근 시간을 지키느라 불 켠 초소에 앉아 동료와 지난 얘길 하거나 휴대폰을 뒤적거린다. 세 군데 초소를 돌아가며 두 달씩 근무하고 원래 시작한 초소로 돌아와 두 달을, 나머지 두 달은 초소 근무조가 쉴 때 이동조로 근무하는 십 개월의 기간제 일이다. 낙동 강변의 M초소는 얼음바람이 나오는 풍혈(風穴)이 있고 다리 아래 노는 잉어를 볼 수 있어 즐거웠다. B초소는 자동차 전용도로 아래 교차로라 소음과 매연이 극성이었다. 지금의 S초소가 형편이 제일 낫다. 집에서 가깝고 미세먼지 없는 날이면 차량 통행이 뜸해 쾌적한 편이다. 그래도 한여름엔 그늘을 찾아도 팔뚝에 번들거리는 땀은 주체할 수 없었다. 풀 싹 돋아나는 봄부터 여름의 더위와 비바람, 가을과 겨울을 겪었으니 사철의 변화를 길 위에서 관찰한 셈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길 위 초소 근무의 경험은 특별했고 또한 지루했다.


딱 정한 만큼의 최저시급은 기간제 노동자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공평하다는 건 적정 임금 이하의 급여를 동등하게 견딘다는 뜻이기도 하다. 농촌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는 여축없는 소득원이지만 소중한 밥벌이다. 적지 않은 숫자의 공무원과 공무직, 기간제 노동자가 지자체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신분의 피라미드는 엄연해서 시골의 공무원은 상전이다. 기간제 노동자는 직종을 갈아타며 고단한 밥을 번다. 다음 파수의 합격 불합격은 순전히 운이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타의 반으로 십오 년 일했던 수목 관리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와 기간제 일을 전전했다. 산불감시원을 세 해 내리 했고, 휴양림 관리인을 했고 재선충병 무단이동 단속초소 근무원을 했다. 앞으로 어떤 직종의 일을 하게 될진 모르지만 나무 자격증을 써먹을 수 있는 직종이면 좋겠다. 근력은 예전에 비해 노루꼬리만큼 남았지만 아직도 땡볕 속에서 풀 베는 일은 할만하다. 뭐니 뭐니 해도 하던 일이 몸에도 맞고 보짱 편하다.


내일은 마지막 근무 날이다.

오전 중에 길에 세워둔 표지판을 철거하고 근무일지와 초소 열쇠를 담당 공무원에게 반납하면 십 개월의 기간제 일이 끝난다. B초소 근무자와 넷이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올해 마지막 수영을 가지 못할 것 같아 오늘 밤 수영을 마치고 매일 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작별을 고했다. 남쪽으로 가서 수영 배우고 쉬었다 온다니 부러워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수영 실력을 키우라고 했다. 샤워하고 밖으로 나오니 달아오른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집으로 오는 도중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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