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인 Jan 02. 2022


개와 산책 다녀오고 얼쩡거리다 방안에 올망졸망 쌓인 짐을 날라다 차에 실었다. 오며 가며 최소한의 짐만 만들기로 했는데 날라 보니 한 차가 됐다. 내려가서도 먹고 싸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식품과 살림을 사는 데 궁리해야 할 것 같다. 다른 데 이동하기에도 차에 넘치는 짐은 버려야 한다. 마저 읽지 못한 지인의 비평서 한 권을 끼워 넣었다. '짐'은 부담스러운 거면서 자신에게 소용되는 대상이다. 그러니까 삶에서 짐은 버려야 함과 지니고 사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짐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챙기거나 꾸려 놓은 물건, 맡겨진 임무나 책임,  수고로운 일이나 귀찮은 물건을 뜻한다. 물질과 정신을 모두 담고 있다. 짐은 부담과 책임, 이로움을 동시에 지닌 거다. 가족과 공동체의 역할을 다하는 사명과 부채의식, 일상의 자잘한 부면에서 편리와 소용을 주는 도구다. 우리는 종종 죽은 이에게 '이승의 무거운 짐을 훌훌 털고 편히 쉬시라' 말한다. 이때의 짐은 망자가 살았을 적 고통과 번민의 대상을 말함이지 그가 사용한 숟가락, 노트북을 말함이 아니다. 짐은 의식과 가치의 소산이다. 생각을 쓸고 닦으니 돋보기안경과 해진 옷, 바리와 숟가락이 전부인 노스님이 떠오른다. 활활 타오르는 다비의 불길 속으로 그는 육신의 군더더기마저 훌훌 태우고 떠났다. 불이 사그라들자마자 재를 뒤져 사리를 찾는 속인의 아우성은 얼마나 남루하냐. 또한 난 얼마나 비루한 짐을 끌고 이승을 떠도는가.


 아침 먹고 나니 하늘에서 비듬 같은 눈발이 떨어진다. 입퇴원을 거듭하며 고통을 견디는 이가 떠올랐다. 그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만일 나라면 그처럼 고통을 형형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삶은 견디는 것이다. 승리 극복 성공의 가치는 얼마나 허망한가. 원아 모집하는 유치원 정문에 '똑똑한 부모의 현명한 선택이 결과의 차이를 만듭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 때부터 성공의 경쟁에 매달리는 고단한 삶을 광고하고 있었다. 차별은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 때부터 출발한 거다. 개와 소읍의 아침을 걸으면서 곰곰 생각했다. 집을 떠나면서 집이란 무언가 고. 집이 혈연에게 둥지 같은 공간이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라면 왜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가. 누구에게 집은 지옥이고 고통의 샘터 같은 곳이고 고향 앞으로 오줌도 갈기고 싶지 않은 지겨운 곳이기도 하다. 생명을 얻어 살아감에 우리는 얼마나 습속의 개념에 억눌려 사는지 모른다.


 존재의 집은 어디인가. 아무 데도 없을지 모른다. 선인은 부초(浮草) 유수(流水) 같은 인간 존재를 자연에 빗대 구름 바람 달을 노래했다. 무거운 짐과 정신과 자연의 모습은  세계를 망라하지만 불교식으로 보면 화엄(華嚴)의 세계다. 삶의 실천을 덕으로 쌓아 일체 조화를 이루는 지극한 세계는 멀고 멀다. 누구는 화엄을 지고 자신의 영달을 위한 똥칠을 한다. 상호부조의 낱말을 이맛빡에 붙이고 상대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침 흘린다. 아무리 부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은총이라 해도 이건 아니지 싶다.  지리멸렬과 중언부언은 삶의 가운데를 뚫는 징표와 같다. 그 끝은 삶의 과정이다. 행복한 기억이라면 짐은 깃털처럼 가벼울 거다. 나는 너에게 짐이고 넌 내게 짐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짐이다. 거추장스러운 짐 바리바리 싣고  낯선 진부함으로 떠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잡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