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인간은 자나 깨나 정치의 범위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에 냉소적인 사람도 정치에 관여하는 중이다. 하지만 투표에 대한 기권은 냉소가 아니라 인간의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는 반 공동체적이다.
3월 대선을 향한 후보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정치란 의회 민주제의 구조 속에서 투표를 통해 좋은 지도자를 선출하고, 제도와 법률의 제정을 통해 공약을 실천해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는 행위이다. 시민은 후보의 공약을 꼼꼼히 살피고 실현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준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선거전, 투표 행위는 온당한 절차를 통해 만족한 결과를 이뤄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수차례 지도자를 바꾸고 하는 동안 사회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크고 작은 변화를 거치는 동안 나아진 부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변화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찔끔대는 거였고 양극화는 심해졌고 계층 간 차별과 혐오 또한 나아지지 않았다. 최악을 피하려면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이 있지만 민주주의의 전형인 다수결 원칙은 언제나 다수의 횡포가 소수를 짓밟는 절차적 민주주의만 횡행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의 풍요, 그리고 인간관계의 사랑과 존중을 통한 공동체의 연대는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부는 더 많이 가진 쪽으로 편중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은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 희망을 포기한 현실은 지옥과 같다. 도시와 지방의 격차는 벌어지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는 욕망은 당연하게 여겨졌는데 부동산 광풍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집은 안전과 화목의 공간이 아니라 욕망을 부풀리는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대다수의 서민은 내 집은커녕 오르는 집값에 표정 관리하는 이웃을 아픈 배를 쥐고 멍하니 바라만 보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와 인문학 강의실에서 아무리 인간의 가치와 삶의 행복을 외친 들 강의실 밖으로 나가면 잔인한 바람이 부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학교에서도 자본(돈)과 관계없는 비인기 학과는 도태되고 인 서울 하기 위해선 친구의 우정을 의심해야 하는 처지가 된 지 오래다. 돈이 신앙이 된 사회에서 사랑과 우정 같은 화애의 덕목은 빛을 잃기 마련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평등한 부의 분배와 공정한 기회와 절차, 공정한 결과가 충족되어야 가능한 목표다. 하지만 물질의 불공정과 함께 노동, 인권도 모든 차별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은 고착화되어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시민과 후보의 입에선 공공연히 선제 타격의 생각 없는 말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난 공자왈 맹자왈로 모두 아는 잣대를 들이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평생 사람 잡아 가두는 일에 도가 튼 사람이 인기에 들떠 느닷없이 국가와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니 뜨악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가 떠드는 말에 담긴 의미를 곱새기면 지나가는 까마귀도 비웃을 정도라 과연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짜증이 난다. 사회 지도층의 인식이 저런 정도밖에 안 되는 것에 슬퍼질 정도니 말이다. 거대 양당의 화려한 공약은 제쳐두고 소수 정당 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외려 공동체의 목표에 들어맞는 게 많다. 이념을 떠나 나이브해 보일 정도여서 지금은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언젠가 우리 사회가 도달할 목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놀라운 건 밑도 끝도 없는 수준의 후보가 여론조사 지표에서 꾸준한 강세를 보인다는 거다.
조사기관과 질문의 방향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대부분은 시민의 의중을 그대로 나타내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 슬프다. 이런 현상은 가짜 뉴스와 자본 제일주의에 물든 의식이 사회의 공기가 되어 떠돈다는 반증이다. 민주 사회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멀다. 다양한 의견들이 섞여 토론을 거듭해 결론을 끌어내는 소란한 사회다. 일치 단결하여 이쪽 아니면 저쪽이라는 식으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분열된 사회와는 결이 다른 사회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게 아니라 사회는 모난 돌들이 모여 함께 온기를 나누며 굴러가는 곳이다. 양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집단의 심리는 능력 있는 자가 성공한다는 적자생존의 심리와 닮았다. 그들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조차 시혜적 동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의 심정은 춥고 배곯았던 사람이 잘 안다.
강남좌파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그들도 부동산 투기와 가족 이기주의에 무관하지 않다. 맑고 투명한 인간은 없다. 그러나 배의 키를 바보에게 맡기는 선원은 없다. 이전의 예에서도 잘살게 해 준다는 말을 믿고 뽑아준 후보에게 임기 동안의 고통은 고스란히 시민의 몫이었다. 난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사회의 소란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게 떠들고 토론을 거듭해 공동체의 올바른 실천 방향을 정하는데 그깟 소란이 문제이랴. 다만 정치적 행위인 투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잘못을 줄이자는 의미다. 한두 번은 봐줄 수 있지만 세 번째의 실수는 그대가 무지한 바보라는 걸 알리는 행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