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며칠 전 한 개의 하늘이 무너졌다.
나머지 다섯 개의 하늘이 흔들린다. 구조 작업은 더디고 가족들은 하루하루 심장이 타들어간다. 누구 네 집 가장이 새벽에 웃는 얼굴로 일터로 향했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상상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남편이, 아내가 아들이 오빠가 일하다 다치거나 싸늘한 주검이 되는 것을. 개인의 죽음은 사건이 되지 못하고 사고로 판명되어 통계 속의 숫자로 매겨진다. 2019년 한 해 산업재해(산재)로 사망한 사람 수가 무려 2020명이다. 2020년 산재 사망자 수는 2062명(사고 882명, 질병 1180명)이다. 전쟁이나 테러도 이만한 비상사태가 없다. 50인 이하 사업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는 전체의 80%를 넘는다.
김포에서, 이천에서 짓던 물류 창고의 화재로 노동자가 떼죽음을 당했다. 광주에서는 몇 개월 전 철거 현장의 건물이 무너져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 9명이 사망했는데 이번엔 짓고 있던 아파트 외벽이 무너져 한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은 실종 상태다. 노동 현장에서 왜 이렇게 많은 노동자가 떼죽음을 당할까. 무리한 공정, 부실 공사, 안전 관리 소홀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집중되는 것은 자본에 대한 사업주의 집착 때문이다. 비용을 아끼려고 무리한 작업을 강행하기 때문이다.
구의역에서 석탄 화력발전소에서 화물 적치장에서 전신주 위에서 청년들이 죽었다. 심지어 실습 나갔던 고교생이 엉뚱한 작업 지시로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친구였던 그들이 꿈을 펴보지 못하고 비명에 갔다. 그때마다 언론과 관계기관은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떠들썩하다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면 이내 사그라든다. 특히 '외주화 된 죽음'은 주로 하청 노동자의 희생에 집중된다. 구조적인 위계로 돼 있는 노동 현장에서 하청은 노예나 다름없다. 해고가 두려워 죽으라면 죽는시늉을 할 판에 작업 거부는 있을 수 없다. 사고가 터지면 기업주는 매스컴에 대고 구십 도로 허리를 꺾어 사과하고 물러난다. 자리에서 물러난 회장은 대주주로서의 영향력은 그대로고 때가 되면 슬그머니 복귀한다. 교활한 기업주의 사과를 얼마나 질리게 봐왔던가. 저들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시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노동 현장의 계속되는 죽음은 멈출 수 없는 건가.
우리는 생존 경쟁의 도가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던져 싸우는 중이다. 내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아이들의 꿈이 사라진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의 죽음은 안됐지만 애써 외면한다. 한동안 도배하다시피 떠들던 뉴스는 어느덧 잊힌다. 속으로는 분노하고 울분을 참지만 노동 현장에 나가면 언제나 그렇듯 시키는 일에 따른다. 등 뒤에선 구조적인 악의 제도가 누르고 있는데 파편화된 노동자의 힘으로는 대적해 싸울 용기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눈물 나지만 타인의 고통에 외면하고 만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가 되어 꿈과 희망을 자본에 맡기고 자본의 품 안으로 뛰어든다. 세월호의 꽃다운 아이들이 '가만있으라'는 어른들의 기만적인 구호에 움직이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에 잠긴 게 선사시대의 일인가. 팽목항의 잿빛 바다를 본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를 짓밟고 숨통을 조이는가.
작가 김훈은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일하다가 떼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수십 년간 계속되고 발생 건수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비극적 사태는 대부분 기업이윤의 틀 안에서 발생하고 있고, 이윤의 논리로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이 수많은 죽음의 배경은 사회경제적이며 구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라며 노동자,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죽음은 사회의 구조적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사불범정(邪不犯正)이라고 하나 사회는 자본의 그물에 덮어씌운 사악한 욕망이 정의를 짓밟고 있다. 자본주의의 망령이 지배하는 죽음의 바다에 인정 없는 공동체의 주검들이 둥둥 떠다닌다. 재난을 주제로 다룬 외국 영화의 대사가 떠오른다. '아빠, 우리 아직 살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