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은퇴자의 꿈 중 하나는 전원생활이다.
사나운 파도 같은 경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이 흐르는 초록의 숲 속에서 삶을 되돌아보며 여유로운 사색에 잠기는 말년을 그린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복한 노후를 종종 보여준다. 이른 아침 부부가 네 발 오토바이를 몰고 흙냄새 싱그러운 오솔길을 달린다. 산새가 잠에서 깨고 고라니가 물을 마시러 계곡으로 내려온다. 수목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세례를 받으며 삶의 축복에 감사한다. 오늘도 날씨가 청명하다.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의 장독대에는 눈부신 햇볕과 바람맞으며 맛깔스러운 된장 고추장이 익어 간다. 도시의 성냥갑 같은 아파트를 떠나 직접 손으로 지은 집을 안내한다. 정갈하고 튼튼한 집의 구조와 방금 따 온 야생화 바구니가 놓인 식탁을 소개하며 부부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쯤 되면 부럽다 못해 슬슬 배가 아프다.
저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숲에서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난 왜 이 모양일까. 자격 지심과 열등감이 온천수처럼 솟아오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본의 풍요를 누리며 소중한 개인의 삶을 향유하다 세상을 뜨고 싶어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하지만 기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손을 내밀지 않는다. 인생의 고비마다 어떤 사람에겐 행운이, 어떤 이에겐 불운이 찾아온다. 행운을 거머쥔 사람이나 불운의 절망에 빠진 사람도 스스로 절망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은퇴 후 말년을 어디에서 보내든지 그건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워야 먹고사는 노년은 고달프다 못해 죽고 싶은 지옥 같은 날들일뿐이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 운 좋은 사람이 사는 럭셔리한 실버텔에서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다. 또는 빗물이 새고 찬바람이 숭숭 통하는 낡은 시골집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이 있다. 주거, 냉난방에서 빈곤의 바닥인 그들에게 읍내의 노인 복지관은 출입조차 버거운 그림의 떡이다. 병원 가는 차비도 아끼는 판국에 복지관의 노래 교실은 여유 있는 노인들 차지다.
노후를 준비 중인 젊은이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각오를 다진다. 반드시 성공하여 만족하는 말년을 보내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무한 경쟁의 사냥터에서 기필코 살아남아야 한다. 동료를 제치고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고 부동산의 미친바람의 방향을 좇아 뛰어야 한다. 전세 사는 사람과 대출받아 내 집 마련한 사람의 일 년 뒤는 하늘과 땅 차이 아닌가. 안 먹고 안 입어 죽어라고 월급을 모아도 다락같이 오르는 집값을 따라잡기엔 절망이다. 우리 동네에 노인요양원이 들어서는 걸 머리띠 매고 혈서를 쓰고라도 막아야 하고, 장애인 학교가 발붙이는 것도 결사항전의 각오로 반대해야 한다. 공동체란 함께 집값 오르고 끼리끼리 똘똘 뭉친 우리들의 세상 아니었던가.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것도 쫓아낸다.
전원생활 프로그램을 보면서 성공주의, 경쟁주의를 떠올리는 건 자격지심의 상상일까.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소견 좁은 배 아픔일까. 아니다. 사회는 위계 간 차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설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게 건강한 사회다. 저들의 풍요와 행복한 노후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경쟁을 부추기고 성공을 부추기고 상대를 찢어 죽여야만 살아남는 사냥터의 생존술을 퍼뜨리는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미래의 연봉을 일등주의로 정하는 교육 제도는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보다 더 자고 공부 못하면 커서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한다'는 말은 사회의 잔혹한 부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자본의 자본을 위한 자본에 의한 사회에서 노동자 산재 사망률이 OECD 1위인 까닭이다.
기회의 공정과 과정의 공정, 결과의 공정이 존재하지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인간의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헌법에도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라고 정해 놓았다.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 주거와 의료, 교육을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동등하게 누릴 권리 말이다.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서 자유로운 사회, 부자와 고소득자는 세율을 올리는 정책에 기꺼이 동의하며 자기가 낸 세금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 장애인과 소수자, 난민을 품어주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나라에서 세계 1위의 자살률, 불평등이 존재하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아니란 걸 말한다. 우리는 지옥을 통과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