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19)


처의 수협 직판장에서 미역과 다시마를 조금씩 샀다.

을 담을 때마다 알바로 일한 양조장 집과 섬에 내려간다니까 가진 게 사과밖에 없다며 사과를 보내준 이에게 줄 거다. 흠과 라며 보내준 사과는 흠과가 아니었다. 빨갛고 맛있었다. 과일을 손대지 않던 내가 영양을 염려한 건 순전히 독거 생활 덕이다. 반찬값을 아끼던 나로선 과한 지출인 셈이다. 섬의 특산물이야 말린 해산물을 빼면 싱싱한 활어와 조개류다. 홀앗이 살림에 술친구도 없으니 회를 먹는다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 보면 '막 썰어 횟집'이 더러 있다. 그날 잡히는 생선의 종류에 따라 썰어서 파는 술집이었다. 대형 수조에 활어를 넣어 관광객을 상대하는 어항은 매일매일 일정한 양이 가능해도 섬인 이곳의 도심은 잡히는 대로 썰어 판다는 거다. 날씨가 사나워 배가 뜨지 않으면 며칠 가게 문을 닫는다. 육지에서 개울이나 저수지에서 붕어 낚시하듯 섬 곳곳 방파제와 갯바위가 있는 곳이면 낚시꾼이 보였다. 잡은 고기를 본 적은 없는데 그들은 끈질기게 미끼를 달고 밑밥을 던졌다. 방파제 구석에는 부유하던 쓰레기들이 한데 모여 둥둥 떠다녔다. 냄새나는 더러운 개울에 낚시를 던져놓고 라면을 끓이는 내륙의 사람과 닮은꼴이다. 바닷가 공원을 산책하는 주민과 여행객은 언제나 눈에 뜨인다. 항구에는 유람선과 고깃배가 연달아 물살을 가르고 바다로 나간다. 코로나 여파로 유람선은 언제나 좌석 미달이다. 어깨를 움츠린 여행객들이 대합실에서 승선표를 쥐고 바다를 내다본다. 섬은 어업 관광이 대세다. 섬의 동쪽과 서쪽에 조선소가 자리 잡았고 도심도 조선소 주변에 위치한다. 나머지 섬을 돌아 들쑥날쑥한 어항 주변은 펜션과 호텔, 횟집이다. 땅이 있는 곳이라면 상록 활엽수가 자라는데 동백나무가 우세하다. 한 나무에 수백 개의 봉오리를 매단 동백나무는 얼마 후면 볼만한 장관을 드러내리라.


는 잘 있느냐고 물었다.

끔 중년의 남자를 뚫어지게 보는 통에 난처하다고 했다. 녀석은 나의 부재를 눈치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그럴 뿐 사유는 확장될지 궁금하다. 한 달 가까이 안 보이다 나타난 날 보고 얼마나 반가워할까. 그리움의 디테일은 없다. 그저 함께 산책하고 매만지는 익숙한 냄새를 떠올릴 거다. 사유의 단순함 때문일까. 업장(業障)이 없어 구무 불성(狗無佛性)이라고 했다. 업의 근원은 사람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개는 업의 끄트머리에 머문다. 냄새와 소리로도 알아채는 건 득도의 경지 아닐까. 코로나 백신 동물 실험을 위해 운반하던 차량이 넘어져 원숭이가 탈출했다가 잡혔다. 의술은 발전해도 불치병은 자꾸 생긴다. 인간 종을 위해 다른 종을 도구로 희생시키는 종은 인간밖에 없다. 만약 우리보다 월등한 지적 존재가 당신을 실험 도구로 쓴다면 당신은 어떻게 저항하겠는가.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도 된다는 개념은 위태하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이즘(ism)에 빠지는 건 위험하다. 이분법의 논리는 상대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논의의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혐오가 위험한 건 불의를 공격하기보다 정의로 포장되어 구체적 인간 삶의 존중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로 했던 말과 행동이 나쁜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웹툰 드라마 <송곳>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요. 좋은 사람 말을 듣지." 어떤 말을 할 때 태도란 상당히 중요하다. 자기주장에도 존중과 예를 보여야 한다. 난 집에서 독재자로 행세하면서 내 생각을 강요했으나 지금은 평등한 관계에서도 올바른 얘기조차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개는 여전히 잘 뛰고 잘 놀고 있다.


일 구조라 해수욕장과 바람의 언덕을 다녀왔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자주 듣보았던 장소라 가보기로 했다. 겨울의 해수욕장은 긴 모래톱 따라 쓸쓸한 발자국을 남겼고 바다오리들은 사람을 피해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바람의 언덕은 이름난 관광지답게 사람들로 붐볐다. 휠체어를 탄 청년을 미는 청년의 모습을 몰래 오래도록 바라봤다. 바람의 언덕 아래에서 낚싯꾼이 밑밥을 던진다. 나무 계단을 올라 풍차를 한 바퀴 돌고 바람의 언덕으로 내려가면서 셀카도 한 장 찍었다. 딸에게 보내니 부럽단다. 난 지팡이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독을 잘근잘근 씹는 중인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오줌 누려고 길 옆의 밭에 내려갔더니 파란 풀 천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갓이다. 씨를 뿌린 건지 바람에 날아왔는지 밭둑에도 무성하게 자란다. 작년 겨울 진도에 갔을 때 파란 대파를 신기하게 봤는데 남쪽은 내륙과 기온 차가 크니 겨울에도 온통 새파란 풀밭이다.


집에 돌아와 이선옥의 「단단한 개인」을 다시 읽었다.

B군 도서관에서 몇 해 전 읽은 책인데 다시 읽은 건 내용을 곱새길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은 무엇보다 양보다 질이다. 많은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평생 읽는 책의 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나쁜 작가의 나쁜 책도 있으니 골라 읽는 게 낫겠다. 내가 다시 읽는 책은 내게 맞거나 인식의 확장에 도움을 준 책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책도 다시 펼친다. 책 전체를 리뷰하기보다 군데군데 새길 문장을 척독(尺牘)으로 옮겨 sns에 올린다. 바람이 있다면 허접한 잡문을 산문집으로 내는 것보다 척독을 모아 책으로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척독은 '짧은 편지'라는 뜻이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쏟아내는 진부한 아포리즘보다 좋은 작가들의 문장은 독하고 쓰지만 정신에는 달다. 공허한 희망을 부추기는 말보다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게 삶의 실체와 개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와 양파를 잘게 썰어 버터랑 볶은 다음 식은 밥을 넣어 다시 볶았다.

첩이 있었더라면 좋을 텐데 아쉬웠다. 좋아하는 후추를 뿌려 아침을 먹고 수영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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