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by 소인

단상


을 야금야금 읽기 시작한다.

두를 것도 숙제도 없기 때문이다. 시궁쥐가 기둥을 갉아먹듯 매일 조금씩 한 페이지를 읽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그것에 매달린다. 종점을 향해 전갈이 사막을 횡단하듯 감질나도록 느린 동작으로 간다. 낮과 밤의 기온 차는 돌도 녹여버릴 정도로 춥고 뜨겁다. 상념은 가슴을 후벼 파 눈물을 쏟아내다가도 이내 마른버짐 같은 무덤덤한 사유를 퍼올린다. 멀고 먼 오아시스는 아예 없을지 모른다.

도서관의 신간 코너를 뒤져 한두 권 빌려오는 게 버릇이 됐다. 될 수 있는 한 평소의 주제와 다른 분야의 책을 고른다. 좋아하는 텍스트에 탐닉하다 보면 생각은 편협해지고 다른 세계와 통섭의 대화가 막히기 십상이다. 무채색의 겨울을 지나 초록 빛깔의 대지로 바뀌는 것처럼 독서의 갈래도 확 뜨이는 보색 대비처럼 색상을 갈아타야 사유의 풍성한 생성을 맛볼 수 있다. 풍성한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출렁이고 생각은 물결을 탄다.


제껏 살아온 삶의 궤적은 남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틴 한 삶의 타성을 벗어나는 게 그나마 말년의 도락을 제대로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 뭘 바라거나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껏 궁구 한 대로 지리멸렬한 삶의 표리를 과감하게 벗겨낼 줄 알아야겠다. 독거 생활 중 드는 생각 중의 하나가 홀로 자다 죽을 수 있겠다는 거였다. 누구라도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이니 그다지 생경할 것 없으나 살아남은 사람에겐 미안한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어수선한 며칠이 지나고 나면 살아남은 사람의 일상은 다시 흔해빠진 진부함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인생의 철학이나 삶의 위대성은 사실 별게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바로 그 상태, 숨 쉬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자체가 삶의 철학이고 존재의 숭고한 덕목이다. 존재함으로 사유하고 행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업장이다.


시 올 수만 있다면 부끄러운, 설삶은 말 대가리 같은 궤적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랑을 고백하고, 혁명의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고, 바다의 노래가 이끄는 대로 해변에 모닥불을 피우고 밤 도와 춤추는 그리스 사람 조르바처럼 거침없는 불길 같은 삶을 살고 싶다. 비루한 현실은 숨통을 조이고 먹기 위해 노동하는 벌레처럼 고단한 그늘을 찾아다닌다.

총상 입은 다리를 자르고 일본의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다시 연변으로 돌아간 마지막 동북 항일 분대장 김학철 선생은 '안락한 삶을 원하거든 인간의 불의를 외면하고, 살아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면 불의에 도전하는 삶' (若想安度一生, 就漠視人間之不義. 但要活得像人, 就向它挑戰)의 좌우명을 푯대로 삼았다. 하지만 현실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 잠자처럼 존재 욕구를 부르짖지만 은둔과 소외를 꿈꾸기도 한다.


가와 속삭이거나 날카로운 꾸짖음으로 가르침을 준 스승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백태 덮인 눈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천 년 전의 성자와 현자, 근대의 사상가들, 혁명과 예술의 불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인물의 궤적은 숨 막힐 정도로 가슴 뛰는 삶의 안내자다. 살만한 세상도 지옥 같은 현실도 아침 이슬만도 못한 공허한 실체인 담에야 끌탕하며 욕망에 매달릴 것도, 애달파 슬퍼할 일도 아니다.

서늘한 각성의 짐조차 내려놓은 수도승처럼 흐르는 바람 한 줄기에도 스치는 빛의 조각에도 무연한 물결로 스미는 의식의 희열을 맛보고 싶은 거다. 그러나 잡놈의 뿌리 깊은 상념은 베갯머리를 떠나지 않고 일상의 허리를 친친 감고 놓아주지 않는다.


영장에 다녀와서 고단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중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늑대 아이(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Wolf Children)를 보았다.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하나(花)는 인간의 모습에서 늑대로 변하는 남자를 만난다. 둘은 사랑을 나누고 남매를 얻지만 남자는 사고로 죽는다. 아이들이 늑대 기질을 가진 것을 안 하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촌으로 들어간다.

유키(雪)와 아메(雨)는 화가 나면 늑대로 바뀐다. 흥분하면 괴물로 변하는 헐크를 닮았다. 마을 사람들과 따듯한 정을 나누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슬프고 아름다운 스토리와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 건 풍성한 배경 화면이었다. 일본 산골 마을의 풍경과 산과 숲이 장면 장면마다 한 폭의 수채화였다. 나무 사이 스민 빛과 그림자의 질감은 수채화 교과서로 화실에 두어도 될 정도였다. 하나의 애니메이션이 탄생하는 데엔 감독과 구성 작가, 인물과 배경 등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

내가 지금 관심을 기울이는 건 배경의 채색 담당이다. 그림을 배우는 중이라 바다에 나가 바위를 봐도 온통 빛과 그림자에 시선이 머문다. 배운 도둑질이라고 예전에 미장을 배울 때는 골목의 시멘트 담장을 보며 걸었고, 여자를 사랑할 땐 거리의 비슷한 나이의 여자를 보며 그녀를 상상했다.


둠이 깔리고 사과를 그렸다.

그리고 나니 썩은 사과가 됐다. 램브란트의 정물처럼 싱싱한 사과는 빛과 시간의 흐름을 겪으며 썩어간다. 누구나 빛나는 시절을 그리워한다.

신은 삶과 죽음을 같은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신은 어디에도 있고 아무 데도 없다. 신은 사과가 썩기 시작하면 떠난다. 썩은 사과에는 초록의 싹과 검은 하늘을 쪼개는 천둥과 비바람, 출렁이는 햇살이 스몄다. 시간은 모두를 데리고 떠난다. 사과가 흙으로 돌아가면 신은 돌아와 사과나무를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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