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48)

팩에 작은 스케치북과 필통, 초코파이 한 개를 넣어 집을 나섰다.

물인 벚꽃은 바람이 건드릴 때마다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길가에 쌓인 꽃잎은 연분홍으로 빛났다. 섬에 내려와 동백꽃과 벚꽃, 수선화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았다. 뒤이어 개나리가 피었다. 난분분하는 시절의 숲은 온통 연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도화지에 물을 흠뻑 칠해 젖은 상태에서 점을 찍으면 색감은 생명을 지닌 것처럼 퍼져 나간다. 자연은 봄의 계절을 질료 삼아 생명을 펌프질 한다. 사멸한 대지에 생성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다. 투명한 바람은 후박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능포동 거리를 스치고 바다와 닿은 숲을 따라 흐른다. 파란 하늘은 마른 도화지 같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 참새 혓바닥 닮은 새순이 돋아난다. 양지암 등대로 가는 산책로에는 진달래가 소담스레 피었다. 미끈하게 솟은 삼나무 사이로 짭조름한 바람이 끝없이 밀려온다. 기름하게 자란 양치식물의 이파리가 기지개 켜며 늦은 잠에서 깬다.


나무와 곰솔(해송)이 주요 식생인 바닷가 숲은 군데군데 키 낮은 돈나무와 후박나무가 섞여 자란다. 겨우내 찬바람에 움츠러들었던 상록 활엽수의 우듬지마다 새순이 올라온다. 해풍과 숲의 비릿하고 상쾌한 냄새가 후각을 간지럽힌다. 산책로를 벗어나 오솔길을 조금 내려가면 탁 트인 남해가 나온다. 갯바위에서 부지런한 낚시꾼이 집어제를 던지며 대어를 노린다. 오늘따라 물빛이 푸른 보석처럼 맑다. 물 바닥의 해초가 파도가 건드릴 때마다 흔들렸다. 수평선엔 언제나 크고 작은 화물선이 닻을 내리고 졸고 있다. 통통통 고등어 배 갈라 소금 뿌리듯 고깃배가 지나간다. 등대 숲 아래 갯바위를 파도가 연신 적신다. 너럭바위에 도착하니 눈부신 햇볕이 따갑다. 더위를 느낄 정도다. 돈나무 그늘에 기대 종이를 펼쳤다. 샤프 연필로 눈앞의 바위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가 잡히지 않거나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땐 눈앞에 보이는 걸 그리면 마음 편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빛과 어둠을 그려 나간다. 바위는 바위를 껴안고 누웠다가 일어서고 바위와 포개며 나란히 걷다가도 뚝 떨어져 외톨이가 되거나 깊은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빛은 시간에 따라 각도를 달리하며 바위의 꺼끌 하고 단단한 몸을 이리저리 데운다. 자연은 생긴 모양이나 움직이는 방향조차 제멋대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동 없이 고정된 정주(定住)의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자연과 생태는 스스로 운동하며 순환하는 삶을 택한다. 거대한 나무, 큰 바위, 끝없는 모래 해변은 정지된 듯 보여도 쉼 없이 움직이고 유동하는 주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빛과 바람, 물기와 어둠의 운행이다. 밤하늘 뭇별의 작은 빛조차 행성의 바다에서 숨 쉬는 조개껍질의 나이테에 관여한다. 동식물과 흙과 돌, 산과 강, 바다는 서로 상관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관계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스로 그러한' 自然이란 말속에 인간 중심이 아닌 생태 중심의 자연이 녹아 있다.


상주의 화가는 빛이 사라지기 전의 풍경을 담으려 재빠른 터치를 시도했다.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고단한 시도 끝에 빛의 조각을 건져낼 수 있었다. 인간은 표현 욕구를 가진 존재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표현한다는 건 소유의 행위와 닮았다. 흐르는 바람 소리를 놓치지 않는 화공의 노력은 예술성의 발현인 동시에, 대상에 대한 집념이 서려 있다.

선 시대 화가인 최북(崔北)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자신에게 그림을 강요하는 무지한 양반에 대항해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한 기행으로 알려진 작가다. 눈보라 치는 어둑한 저녁 무렵 동자와 함께 산속 오두막으로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이 생의 덧없음과 삶의 유한성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의 그림 한 폭에는 세상의 풍진과 절연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서늘한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시간 가까이 눈앞의 바위 그림자에 몰입하는 순간은 더없이 즐겁다.

삶의 희열은 생산성과 효율을 배제한 도락으로서 심신의 행위에 있다. '살아 존재'하는 게 삶의 의미다. 그러므로 죽음은 반인간적 사건이다. 자본의 속성 중 하나는 반인간, 반생명에 있다. 사랑과 우애, 연대와 공감은 자본과 다른 상생의 결을 지닌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타자와의 관계성에 있다. 자신이 투영된 타자는 지옥이기도 천국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관계는 지옥과 천국을 넘나드는 관계의 숙명 또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의식이란 썩은 사과, 시든 꽃, 절망에 휩싸여 우는 노인, 기차에 대가리가 잘린 개의 평온한 표정에서 삶의 미추를 통찰하는 의식이다. '좋아요'와 '이뻐요'의 동일체 의식은 다양성을 경험하는 통로를 막는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하게 닮은 꿈을 욕망하지 않고는 사냥터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너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 편안히 잠들 수 있다.


어서려는데 바닷물이 끓기 시작한다. 멸치 떼인가? 거품이 일며 수면이 자잘하게 부서진다. 사방 오십여 미터의 수면에서 고기떼가 유영하며 맴돈다. 정어리의 피쉬볼이라면 군무의 장관을 볼 수 있을 거다. 작은 고기를 놓칠세라 큰 물고기가 뛰어들어 먹이 사냥을 한다. 세렝게티 초원의 먹이 사슬이 떠올랐다. 낚시꾼이 밑밥을 던지자 물거품이 일제히 솟는다. 양어장의 식사 시간이다. 바다는 생명을 몰고 다니는 활어의 운동장이다. 세대를 이어 살아 숨 쉬는 바다를 보는 건 꿈에 불과할까.

아오는 길에 10kg짜리 '메뚜기 쌀'을 사서 안고 왔다. 섬에 내려와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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