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집으로 돌아가면 밥벌이를 위해 일을 찾아야 한다.
섬에서의 반년은 다시 누려보지 못할 경험이다. 내륙에서의 일상에 물려 탈출을 감행했던 건데 다시 지리멸렬한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여축없는 생존의 일상은 사유를 소거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추위와 더위, 게으른 늦잠을 허하지 않는 규칙적인 출근과 퇴근은 일상의 자유를 무화시킨다. 휴일은 충전의 시간이 아니라 잠시 일에서 놓여난 시간일 뿐 새로운 상상의 생성을 건네지 못한다.
인간은 자유를 상상하지만 사실 인간 조건에 완전한 자유는 희망 사항일 뿐, 태생과 죽음의 삶의 전 과정은 철저히 사회와 환경, 습속과 제도에 구속된 존재다. 삶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와 욕망을 꿈꾸는 게 실존 조건이다. 하지만 자꾸 일탈하고 싶다.
잡문을 끼적이고 수영과 그림을 도락으로 삼는다 해도 갈증은 여전하다. 그래서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탈주를 도모하는 거다.
섬에 내려와 확인한 건 존재의 관계성이다. 삶의 맥락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산소와 같아서 생각 없이 마시면 폐가 터지고 호흡을 멈추면 죽는다. 조금만 숨 쉬고 싶은데 관계는 덩이줄기처럼 새끼 치다가도 어느 순간 날카로운 삽 날에 끊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고독은 상처의 요긴한 치료약인데 고독마저 침범당하기 일쑤다. 내 안의 관계 본능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관계를 갈망하면서 관계에 상처받고 관계에 절망한다.
관계가 두려운 오타꾸족은 밀실에서 가상의 광장을 출입한다. 예전의 은자(隱者)는 산속에서 시를 지어 개울 물에 뛰워 보냈으나 세계는 고독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의 품 안에 들어 노예의 직분을 다하는 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소모적 존재는 쓰다 버린 건전지가 될지언정 자본을 충실히 섬긴다. 자본을 추앙하지 않는 집단은 나무나 돌 같은 울타리 밖의 존재로 취급한다. 악마가 군림하는 성 안으로 들어가야 목숨을 보존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내가 본 사물과 풍경을 표현하는 건 사물과 풍경의 내면을 닮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그린 그림은 타인에게 흡족했으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기란 실은 나를 투사할 대상을 찾는 거였다. 노래하고 글을 쓰고 행위하는 건 세계를 향한 나의 비추기다. 표현의 욕망은 집착과 닮아서 때론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지만 인간은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행위하다 죽음에 이른다. 행성에 나무가 자라 산소를 공급하듯이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세계에 투사한다. 문화와 역사의 행위-되기는 자연과 닮았으나 인간의 의지와 우연적 사건은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집요하다.
가난도 그렇다. 가난은 이미 전염된 병과 같이 한시도 건강한 몸을 버려두지 않는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쓰러뜨리고 만다. 아니 쓰러질 때까지 백기를 들고 투항할 때까지 고통과 번민의 통점에 충격을 가한다. 초년부터 말년까지 붙어 다닌 궁핍의 딱지는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가난이란 단어는 수제비나 국수를 매일 삶던 구체적 현실을 떠올리지만, 빈곤은 정신을 포함하여 추상적 통계적 개념의 뉘앙스를 풍긴다. 정부는 빈곤이라는 어휘 사용을 즐긴다. 그래서 구체적 가난, 현실적 절망은 슬그머니 제풀에 모습을 숨긴다.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과 무능으로 비롯된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수채화는 참을성과 물기가 완성하는 그림이다.
싼 종이는 싼 종이에 맞는 물 먹임과 터치로 그려야 한다. 고급진 300g 황목으로 다루었다간 종이 밑창이 드러나거나 찢어진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부자라고 모두 비열한 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착하고 억울한 것도 아니다. 욕망은 운과 개인의 편차에 따라 그를 부자로도 가난의 대열에도 끼이게 한다. 안빈낙도는 감당할 사람이 견디는 열락의 경지다.
앞으로도 가난한 삶을 살 테지만 진부한 희망으로 연명하는 건 두렵다. 일하고 쉬고 다음 일자릴 찾으러 기웃거리는 현실이 지겹다. 요즘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 없다며 절대적인 가난은 사라졌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상대적 가난이다. 강남 좌파나 사는 데 어려움 없는 사람이 차별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걸 보면 부럽다 못해 위대해 보인다. 그들은 공정한 빵엔 관심이 멀어 보이지만 난 풍요의 자유를 누리지 못해 끌탕하는 게 아니다. 풍성한 삶을 사는 데 관계는 발목을 잡아당긴다. 고독과 은둔하는 삶의 공허와 절망이 나를 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허청거리며 살다 깨달은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