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49)
옥상에 빨래 너니 바람 분다.
원룸 숲으로 둘러싸인 동네 터서리로 소의 잔등 같은 산이 순하게 지나간다.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은 뭍의 발목을 적시며 미역처럼 섬을 휘감아 돈다. 산자락엔 듬성하게 새순이 오른 나무가 보인다. 이맘때 내륙에는 산벚나무가 환하게 불을 켠다. 섬에 내려와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뛰었다. 찬바람에 뜸 들이던 동백꽃이 피자 벚꽃이 튀밥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꽃그늘 아래서 행복한 미소가 터지는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벚꽃이 지자 해는 점점 뜨거워졌는데 이번에는 무성한 잎이 친절하게 햇빛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늘을 찾아다니며 고마워한다.
처음 이 개월은 시간이 더디 가는 것처럼 느꼈는데 이젠 봇물 터진 듯 빠르게 흘러간다. 소박한 계획이지만 수영과 그림은 물살을 타고 나아간다. 물살을 탔다는 의미는 내릴 때가 다가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스케치하고 물을 바르고 하늘을 칠했으니 먼산을 그리고 가까운 숲에 나무와 돌을 앉혀야 한다. 디테일이다. 벌레 먹어 구멍 난 나뭇잎, 비바람에 깎인 돌의 표정을 붓으로 새겨야 한다. 삶의 디테일은 세필로만 그리는 게 아니다 붓모가 닳은 거친 갈필로도 일상의 내밀한 흔적을 그릴 수 있다. 빽빽하게 들어 찬 완성된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후줄근하게 빈듯한 공간이 숨 쉬는 곳의 여백에 조화로움이 펼쳐진다. 삶의 융성이다.
가끔 바다에 나가는 외에 종일 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다. 의욕만 앞서지 생각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소질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해리 포터도 아닌 것이 때깔 좋은 사과를 썩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다. 썩은 사과는 나만의 전매특허라고 위로한다.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선과 각은 부러 꾸민 것 같아 저어하는 게 내 습성이다. 삐뚤빼뚤 자연스러운 선과 면의 부조화, 제멋대로 생긴 대상의 변화를 그리고 싶다. 삶은 변화와 성장에 의미를 지닌다. 서늘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변화는 변질을 막아낸다. 부패한 삶은 이미 죽은 삶이다.
고유한 감정과 자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 Ava'와 인간의 구별은 신체성에 있다. 데카르트는 이성과 신체를 구분하여 정신을 우위에 두며 합리적 이성 아래 신체를 하위에 두었지만, 신체 없는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명제로 인식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는 존재하므로 인식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간단한 예로 그림을 그리는 손은 기계처럼 종이 위를 오가는 게 아니다. 붓의 터치와 색감의 조절, 대상을 관찰해 표현하는 의식은 몸(손)의 움직임과 함께 나아가는 행위다. 영화에는 신체는 없고 뇌만 살아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바이러스가 침투해 선한 생각이 바뀌는 순간 뇌는 범죄를 조종하지만 전원이 꺼지는 순간 사망한다. 생각 없는 사람을 무뇌라고 하지만 신체 없는 뇌는 유령과 같다. 신체를 상품화하는 자본주의는 신체를 섬기는 게 아니라 속물화한다. 그렇다고 정신이 존중받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몸과 의식을 뿌리에서부터 물신화하여 세계를 지배한다. 물성을 지배하고 정신을 세뇌시킨다.
수영과 그림 얘기만 늘어놓아서 좀 그렇긴 하다.
벚꽃 길은 이제 무성한 나무 터널이 되었다. 꽃그늘 아래 미소 지으며 사진 담던 사람들은 나무 그늘을 걷는다. 햇빛은 따갑고 바람은 거세다. 수선화 진 자리가 추레하다. 꽃은 내년 봄의 개화를 꿈꾸지만 사람의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편 먹은 듯 그저 매일이 봄이려니 눙치고 사는 게 건강에 좋을지 모른다. 겨울에 비닐하우스 딸기를 먹듯 봄이 와도 겨울을 견디는 게 일상이 되었다. 더러운 계절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빠르게 다가온다.
화실에서 도시락 먹고 연필 소묘로 바람 든 무를 그리고 수영장에 갔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아 물안경의 고무 끈을 느슨하게 했더니 자꾸 물이 들어온다. 다시 끈을 조이고 물살을 헤쳤다. 헤치다가 내처 삼십 분 내리 물살을 갈랐다. 1.6km 수영을 했다. 레인을 왕복하며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땅에서라면 하품도 했을 거다. 호흡이 터지니 한 시간 수영도 가능하다. 지루함이 문제다. 바다 수영은 풀장과는 엄연히 다르다. 너울대는 파도와 맴도는 물살이 나뭇잎 같은 몸을 이리저리 덮치고 팽개친다. 팔다리를 저어도 제자리걸음일 때가 있다. 바위섬은 코앞인데 파도의 날카로운 손아귀가 허리를 감아 당긴다. 엄청난 체력과 돌발 상황이 변수다.
수영하는 동안 사람들이 샤워장으로 달려가고 초등학교 수영부 아이들이 입장한다. 숨을 마시려고 물 밖에 고개를 내밀 때마다 수영장의 상황이 한쪽 눈에 들어온다. 관리인이 강사 사무실에서 나오다 멈춰 서서 날 바라본다. 그는 검수완박을 미친 짓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다. 여기서 사귄 친구다. 손을 흔들 짬이 없다. 벽을 차고 계속 레인을 돈다. 생각해 보니 요새 계속 풀만 먹었다.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서 생닭을 사다 백숙을 먹어야겠다.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아내는 개랑 산책하는 뒷산에서 참두릅과 개두릅을 많이 땄다며 택배로 부쳤다. 산나물이란 게 노인은 다리 아파 산에 못 가고 젊은이는 나물 따윈 관심 없어 산에 안 가니 어중간한 장년의 차지다. 참두릅은 데쳐 초고추장에 찍고 개두릅은 데삶아 마늘 국간장 소금만 넣고 무쳐 화실 회원들과 맛나게 먹었다. 연필 소묘는 이달로 끝나고 다음 달부터 물감 채색에 들어간다. 이후 작품은 혼자서 하는 외로운 행위다. 두 달이면 화실은 졸업이다. 벌써 화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솔직히 정권이 바뀌면서 조졌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역사의 기로에서 무릎이 꺾이고 만 기분이었다. 물살을 탈 소중한 기회를 놓친 건데 민주적 절차니 민심은 천심이란 말을 의심하게 되었다. 패를 조져버린 누군가 손가락을 자르고 싶을 거란 말을 했는데 예언은 적중할 걸로 본다. 무지의 손가락은 생명이 질겨 도마뱀 꼬리처럼 잘린 자리에 새살이 돋아난다. 패배에 젖어 낮술 퍼마실 형편은 아니다. 희망이 박살 났다고 살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러운 기분은 쉽게 씻어내지 못할 거다. 언론은 진실의 빗장을 걸고 저들의 카르텔을 단단히 지켜낼 거다.
웃기는 건 슬픈 시절을 견디고 나면 노인 반열에 끼어든단 얘기다. 물론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기억력과 근력이 점점 떨어지는 건 불감당이다. 살면서 하도 욕을 많이 해서 치매 걸리면 착한 노인이 될지 모른다.
아침마다 능포항 바다를 본다.
홍가시나무는 붉은 새순을 한 자 넘게 키우고 온통 붉은 외투를 걸친 모습이다. 만조의 바다는 짠물을 배 터지게 밀어 올리고 데워지는 중이다. 부지런한 낚시꾼이 줄을 감는다. 반짝이는 햇살이 낚싯줄에 달려 나온다. 빈 바늘을 움켜쥐는 낚시꾼의 손이 가볍게 흥분한다. 섬은 어디를 둘러봐도 그림이다. 바다에 나가면 그림을 그린다는 인간의 행위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대상을 액자에 가두려는 건 소유에 대한 집착일 수 있지만, 닿지 않는 꿈에의 열정이기도 하다. 탓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 에랴.
섬사람들은 육지 사람들과 닮은 욕망을 품고 살지만 대체로 넉넉하거나 초연한 듯 보인다. 한반도 사람들은 위아래로 대체로 비슷하다. 같은 언어와 비슷한 물색을 보고 살아서 그런 것 같다. 만화경 같은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색다를 것 없어도 소중한 저마다의 색깔을 칠하며 산다. 떠나온 B 군이라고 별반 다를 건 없다. 뻔한 삶인 줄 알면서 살아내는 가슴 선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진부함 속으로 들어간다. 가까이 살며 보지 못했던 시인, 화가와 나물 안주 곁들여 섬의 풍광과 섬사람들이 물들인 바다 색깔을 전해야겠다. 잔잔하고 사나운 파도가 휘몰아 덮칠 때 신음하는 나무처럼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고 삶을 버틴다. 공허한 희망이라도 느닷없는 절망보다 한 길 위라고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