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작은 글씨는 해독이 불가한 때가 많다. 이참에 난방은 꺼야겠다고 생각하고 보일러 스위치를 껐다. 웅웅 보일러가 계속 돌아간다. 설거지하고 식은 물이 데워지느라 그런가 하고 내버려 뒀다. 한참 지나도 보일러가 돌고 방바닥이 점점 뜨거워진다. 자세히 보니 전원을 누른 게 아니고 온돌을 누른 거다. 전원을 끄니 보일러가 멈췄다. 이런 식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건 어렵게 되었다. 광고회사 다닐 때 스무 가지 정도의 업무를
처리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술집으로 달려갔다.
요즘엔 두어 사람과 톡을 주고받을 때 이쪽 사람에게 보낼 내용을 저쪽 사람에게 보낸 적이 있다. 아내와 톡 하다 숨겨놓은 여자 들키기에 딱 좋다. 아마 사랑한다고 했으면 아내는 이 인간이 뭘 잘못 처먹었나 물었을 거다.
sns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세상이 되었다. 현대인은 가상의 세계에서 공감과 연대, 동일성의 소속감을 확인하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말 거다. '좋아요'와 조회 수에 희비가 갈리는 인정 욕구는 살벌한 사냥터에서 살아내기 위해 sns 교를 숭배한다. 그만큼 생존의 불안과 공포는 전방위적이다.
나는 무려 네 군데의 sns 기지를 차리고 세상에 통신을 전한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브런치 북, 인스타그램이다. 카카오스토리는 일기와 같은 내용이고 페이스북은 선별된 글을 올리는 정도다. 중복되는 경우도 있다. 글을 쓰고 퇴고를 거듭하며 띄어쓰기, 오자를 가려내는 데에 브런치 북의 맞춤법 검사를 활용한다. 그런 다음 sns 공간을 향해 타전한다. 감추고 싶은 글은 누르기 한 번으로 간단히 숨긴다. 인스타그램엔 주로 우리 집 개의 근황을 올린다. 매일 두 번 이상 산책 나가 똥오줌을 해결하는 녀석이라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사진을 보낸다. 까칠하고 인색한 성벽이라 sns 상이나 현실에서 친구가 별로 없다. 오래된 친구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야멸차게 문을 닫아버린다. 때로 그들도 나의 존재를 소거한다. 통틀어 스무 명 남짓 될까. 남들이 수없이 친구를 신청하고 쌓는 행위를 이해한다. 그렇지만 올라온 글이나 사진을 친절하게 거들떠볼까.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사유하는 인간에게 타인의 일상은 여간해서 관심 밖이다. 그저 안부 인사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정도의 흔적을 남길뿐이다. sns에서 댓글과 답글을 남기는 사람을 보면 대단한 성의라고 느낀다.
오전에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어제 인스타그램에 올린 개 사진이 주르륵 떴다. 이게 웬일인가 하여 죄다 삭제했다. 곰곰 생각하니 인스타에서 무슨 메시지 창이 떴던 것 같다. 읽기 귀찮아 공유나 전송인 줄 알고 누른 것이 페이스북으로 넘어간 듯하다. 이래서 노인들은 인터넷 뱅킹이 금기다. 시골의 노인들은 걷고 버스 타고 읍내 농협에서 세금을 낸다. 시골 농협에는 등 굽은 노인들이 득시글하다. 그들은 창구 직원에게 통장과 청구서를 통째로 맡긴다. 나의 카스, 브런치 북, 페이스 북에 친구로 남은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 잡문을 찬찬히 읽어주고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 간장 종재기만 한 좁은 국량으로 생각해도 내가 졸필을 멈추지 못하는 건 그분들의 덕이 자못 무량하다. 마음을 나누는 적은 숫자의 친구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아낼 만한 공간이 된다. 인생은 수명의 양보다 질에 달렸다. 상황에 따라 기회와 출세를 노리며 백세를 누린 장군보다 불꽃처럼 짧게 살다 간 젊은 혁명가를 오래 기억한다.
해마다 바꾸는 돋보기안경의 두께는 늘어나고 작은 글자는 물론이고 읽은 글자의 문해력조차 떨어지니 난감하다. 책을 보기가 두렵다. 한 시간 이상 독서하면 삼십 분은 맨눈으로 쉬어야 사물을 식별할 지경이다. 냄새와 소리, 맛과 시력이 떨어지니 오감의 도락과도 점점 멀어진다. 약의 종류는 늘어나고 오줌발은 발등을 적시니 갈 날이 가까운 듯하다. 선배 제현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다. 그래도 문기둥 갉아먹는 시궁쥐처럼 책을 들추고 갈라파고스의 바다거북처럼 물살을 헤치고 고흐 형님의 열정을 본받아 삶의 도락을 멈추지 않는 게 사는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