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人暮らし(50)
오후에 수영장에 갔다.
밤새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날이 새자 강약을 조절하며 내렸다. 문화원 뒤란의 커다란 비자나무 이파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구슬만 한 연두색 열매가 오종종 매달렸다. 팔손이나무는 무거워진 이파리를 감당하느라 허리가 휜다.
비 때문인지 화실 출석 인원이 적다. 그래도 점심 식탁은 푸짐하다. 상추에 산초 싹을 얹어 먹으니 별미다. 베이컨 야채 말이, 집 앞에서 딴 머위 무침, 맛깔난 양파 오이장아찌 등 봄의 쌉쌀하고 새뜻한 입맛들이 어서 먹어주십사 다툰다. 난 마지막 두릅 엄나무 순 무침과 냉장고 뒤져 남은 호박을 볶아 왔다. 화요일과 금요일 점심시간은 행복하다. 맛있는 점심을 회원들과 나누기 때문이다. 해마다 봄이면 뼘뙈기 마당 구석에 상추를 심어 입 찢어지게 먹곤 했는데, 그 흔한 상추쌈을 오늘 처음 먹었으니 홀아비 살림이 궁색하긴 하다.
식색본성(食色本性)이라지만 도대체 삼시 세끼 챙기는 게 이리 대단한 수고인지 미처 몰랐다. 색은 성(性)만이 아니다. 남녀의 성합을 포함한 일체 물성의 욕망을 의미한다. 귀찮아서 색다른 메뉴를 차릴 마음이 없어 하루 한 끼만 먹었으면 좋겠는데 때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먹어야 사는 건 하늘이 내린 생명 현상이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연필 소묘로 그리던 군화의 그림자를 문지르고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다음 달부터는 대망의 색칠 공부다. 코로나 확진자는 차츰 줄어드는데 수영장은 여전히 썰렁하다. 샤워하고 내려가니 아무도 없다. 몸을 풀고 킥판을 안고 발차기하는데 여자 둘이 내려와 물을 찬다. 너른 레인을 하나씩 차지하고 물살을 가른다. 사람 뜸할 때 장거리 수영을 해보기로 했다. 사십 분 내리 수영해서 2km를 완주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동작을 가늠하며 레인을 왕복해도 40분 수영은 지루하다. 하품이 나왔다. 정말 하품은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마실 때 감쪽같이 뱉어냈다. 동작이 자연스러우면 어깨와 팔다리에 부담이 덜 간다. 세 시가 넘어 초등학교 수영부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작은 팔다리로 물을 차고 영법을 바꿔 가며 나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이들 중 국가 대표 급 선수가 나올지 모른다. 한참 구경하다 샤워실로 갔다.
일요일에 아내와 동네 친구 둘, 젊은 부부가 놀러 온다고 했다.
집에 가서 물으니 옆방이 비어서 하룻밤 빌려 쓰기로 했다. 수영장에서 만난 회장 아줌마가 싸고 깨끗한 횟집을 소개해줘 전화로 예약을 해두었다. 일박 이일의 짧은 일정이라 섬의 풍경 이모저모를 안내하기엔 벅차다. 기껏 다닌 곳이라곤 스치듯 섬을 일별 했을 뿐이니 평소 즐겨 다니던 곳을 소개해야겠다. 능포 해변 공원, 양지암 등댓길, 바람의 언덕, 우제봉 해금강 전망대, 몽돌 해변, 구조라 해수욕장만 더듬어도 바다에 목마른 내륙 사람에게는 환상의 코스일 터다. 섬에 내려온 동안 한 번 놀러 오겠다고 한 말이 성사되는 순간이다.
섬에 내려와 일상의 동선에 얽힌 인연을 만났다.
성장이란 낯선 환경을 만나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면서 적응 해가는 과정이다. 낯선 환경이란 사물뿐 아니라 사람을 둘러싼 관계 전반을 일컫는다.
자신의 미성숙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려 하는 아이는 스스로 이미 성숙했다고 생각하며 성장하기를 멈춘 어른보다 더 긍정적인 존재다. 어쩌다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이 나와 바다를 보러 온다는데 두루두루 좋은 추억이 되길 바란다. 여행은 함께한 사람과의 기억이다. 여행의 맥락을 배제한 관광은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며 스치는 풍경을 사진에 담기에 바쁘다. 시간이 지나면 풍경조차 소거되고 만다.
빈방을 쓸고 닦고 슬리핑백 담요서껀 죄다 꺼내 손님 맞을 생각에 설렌다. 벚꽃 난분분하던 풍경은 놓쳤어도 늦게 핀 동백이 아직 산책길을 서성이는 중이니 다행이라 여긴다. 배추 겉절이 김치라도 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