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꺼 일기

by 소인

一人暮らし(56)


여섯 시 이십 분에 집을 나섰다.

퇴근 시간에 섬의 서쪽으로 가는 건 처음이다. 지는 해가 눈을 찔렀다. 회색 근무복을 입은 조선소 노동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넌다. 팻 타이어가 세 대나 보인다. 집에 있는 퉁퉁한 접이식 팻 타이어 자전거로 여행을 했다. 찜질방에서 나와 한겨울의 밀양 거리를 가는데 남자가 신기하다며 웃었다. 당시 보기 드문 팻 타이어 자전거는 가는 데마다 눈길을 끌었다. 낮은 단수의 기어라 언덕만 나타나면 내려서 끄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능포동 원룸에서 도서관 가는 길은 이제 눈 감고도 갈 정도가 됐다. 십오 분 전에 도서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젊은 남녀가 스케치북을 들고 로비로 들어간다. 따라 들어갔다. 학습실을 제외하곤 열람실 불이 모두 꺼졌고 계단 통로는 막아놓아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했다.

도서관에 갔을 때 어반 스케치 강좌 포스터를 보았다. 사서에게 물으니 정원이 다 찼단다.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 모두 여섯 번의 강좌인데 수채화 스케치에 도움이 될까 하여 대기자 명단에 올려두었는데 그저께 준비물 문자가 떴다. 스케치북과 4B 연필, 지우개가 전부였다. 색연필은 강사가 말해준다고 했다.


그림 상자에서 색연필을 찾으니 오래된 것만 들어 있었다. 강릉에서 사귄 식품 영양학 박사 내외가 유럽 여행 때 헝가리의 유명한 문구점에서 산 색연필은 보이지 않았다. 이달 초 아내가 내려왔을 때 겨울옷서껀 미리 보낸 짐에 딸려 보낸 거였다. 오래된 것도 아직 쓸만하다. 그의 아내는 내게 연꽃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십 년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중이다. 전문 화가가 아닌 담에야 공장에서 물건 만들듯 뚝딱 찍어내지 못하니 말이다. 약속은 늘 기억한다.


삼 층 대강의실 입구에 출석 명단에 싸인했다. 내 이름은 앞에서 두 번째였다. 환한 강의실 앞에 강사가 서 있었다. 인사하고 맨 앞에 앉았다. 하나둘 수강생들이 자리에 앉는다. 돌아보니 스무 명은 돼 보인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예술이 삶에서 기여하는 건 위로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감상하든 직접 해보든 예술은 인간의 상상을 자극하고 새로운 길을 안내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독자 스스로 세계를 해석하는 행위다. 작가의 창작물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사유의 공간을 열어 가는 독자는 이전의 공간을 지나 다른 세계로 발을 딛는 경험을 통해 예술의 서늘한 손을 잡는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미래를 점치거나 자연에 대한 경외를 다짐했던 원시 인류는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을 동굴 벽화로 남기거나 춤과 노래로 표현했다.


현재의 절망과 꿈과 이상을 형상화하고 즐기는 건 인간의 특성 중 하나다. 현대 인류는 그것을 제도나 사상으로 대치하기도 하지만 예술의 쾌락적 기능을 경험하는 걸 즐긴다. 꽃을 보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은 예술과 삶의 관계에서 그만큼 동떨어졌다는 걸 뜻할 수 있다. 꽃의 상징이 주는 건 생명과 아름다움인데 생명은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동시에 내포하기 때문에 꽃은 곧 삶을 대변한다. 미의식에 대한 생각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선 긋기 연습을 시작하자 강의실에는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슥슥 싹싹 삼 층 밖의 하늘은 무채색으로 차분하게 내려앉는 중이다. 강사는 꼼꼼하게 잘한다고 말하며 수강생들에게 내 스케치북을 들어 보여주었다. 어떤 수강생에게는 연필 소묘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열이면 열 사람마다 연필 선이 다르다고 말하며 선이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이전에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는 분은 이실직고하라고 웃었다. 첫날 시간을 빨리 지나갔다. 강사는 한국화를 그린다고 했고 고성 가는 국도 변의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라고 했다. 수강생이 검색한 선생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처음 만난 사람의 주변을 알아본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학생들의 연필선을 보았다. 정말 선생의 말대로 모두가 달랐다. 처음 선 연습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여자가 대부분이고 남자는 나를 포함해 네댓이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내가 제일 노땅이었다. 그러다 너무 기초 수준에 머문 스케치를 배우러 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중간에 그만두자니 하나라도 배우는 기회인데 시간이 남는 형편에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이미 나의 선 긋기 수준은 삐뚤빼뚤 인 게 확인되지 않았던가. 도서관 직원은 강사를 소개할 때 60% 출석하면 수료증을 준다고 했다. 어반 스케치 수료증은 어디에 써먹을까. 말 그대로 길에서 스케치하는데 써먹으면 그만이다.


강의실은 사람의 체온으로 좀 더웠는데 난 쓰고 간 캡을 벗지 않았다. 반짝이는 민머리가 드러나 사람들에게 묘한 생각을 불러일으킬까 성가셨다. 노인네가 늘그막에 그림을 배우겠다고 호기롭게 납셨구나 할 거였다. 아무려나 눈에 띄는 건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앞줄에 앉아 선생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선생은 요즘은 모든 사조가 해체되어 그림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그린다고 했다. 마치 샤갈의 그림처럼 공중에 떠다니는 남녀나 피카소처럼 인체가 분해된 표현의 그것처럼 대상에 대한 생략과 작가의 상상이 회화 세계를 펼친다는 거였다. 선생은 멀리 고성에서 섬까지 날아온 건 예술 특히 그림에 대한 저변 확대와 혹 있을지 모르는 재능 있는 사람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반기 주간 강좌에 대해서 소개했다.


내 뒤에서 쓱쓱 삭삭 선을 긋는 사람들은 어쩌면 생애 초유의 경험을 하는 건지 모른다. 종이 위에 선을 긋는다는 건 무엇을 표현하려는 본능의 욕구다. 그림과 예술의 일차 기능은 삶에 대한 위로와 감동이다. 작품을 읽거나 듣고, 또는 보고 난 후의 세계는 이전과 다르다. 변하지 않는 세상을 살기 위해선 내가 변해야 한다. 철벽 같이 단단한 세상의 습속은 변할 생각도 의지도 없다. 오늘 나온 수강생 중에는 그림을 배우러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더 나아가 미대로 진로를 결행하거나 갤러리나 박물관의 도슨트(docent)를 꿈꾸는 이도 생길 거다. 무엇보다 선을 긋는 행위는 자신의 삶에 일획을 긋는 것과 같다. 저들의 선에 행운이 깃들기를!


프랑스의 철학자 샤를 페펭은 「만남이라는 모험」에서 '우리는 타인들에게 의존한 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만남이란 우리 인생에 덧붙여진 장식품 같은 것이 아니며 부차적인 소품 같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만남은 우리에게 필수적이며 우리의 인격을 빚어내기까지 한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평생 경험하게 되는 모험의 중심에 '만남'이 자리 잡고 있다.


만남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고 세상으로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만남이 지니는 힘과 신비로움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나는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고 타인과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연한 태생으로 부모를 만난 것처럼 삶은 만남과 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만남에도 생성과 사멸의 순환이 있고 우리는 만남을 거듭 통과하면서 성장과 변화를 기획하는 존재다. 일하는 아내는 섬에 내려가 핀둥거리는 내 꼬락서니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꽈배기 여사의 특유의 심술이 부쩍 늘었다. 집에 돌아가 다시 밥벌이를 하면 진부한 일상은 되풀이된다. 우리는 살면서 넘어진다. 넘어지는 게 사고가 아니라 넘어져도 아픈 이유를 모르는 게 문제다 주말엔 곰돌이를 그려 보기로 한다. 아침저녁 밖에서 산책을 해야 배변을 해결하는 진돗개에게 식구들이 노예가 된 느낌이다. 곰돌이만 신났다. 쓱쓱 삭삭 사람들이 종이 위에 자신의 길을 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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