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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01. 2022

도꺼 일기

一人暮らし(59)


섬의 서쪽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잔뜩 샀다. 어제 딸아이가 월급 탔다고 용돈을 입금한 거였다. 염치 불고하고 고맙다고 극구 칭송했다. 백화점 건물 오 층의 일본 의류 매장에 가니 수영복은 없다. 입고 있는 수영복은 산 지 십 년이 넘어 상표가 너덜하게 떨어질 정도로 낡았다. 백화점은 섬의 중산층이 단골이다. 값비싼 상품이 눈부신 조명 아래 반짝인다. 지하의 대형 마트로 내려갔다. 생일이라 아들에게 톡을 했다. 오 년 만에 답장이 왔다. 잘 살고 있다며 가슴에 담아놓은 아픈 얘기를 꺼냈다. 미안하다고 했다. 아비가 미워도 연락한다는 게 위안이 된다. 죽음보다 살아 있을 때 가혹한 운명도 있다. 저지른 업은 평생을 혹처럼 따라붙다 무덤까지 간다. 미국 사는 조카가 가을에 P시에서 결혼한다. 결혼만 하고 다시 떠난다. 가봐야겠다. 아들은 오지 않겠다고 했다. 곰돌이는 더워지는 날씨에 여전히 산을 누비고 다닌다. 근육만 남아 쪽 빠진 몸매에 생김새가 점점 늑대를 닮아간다. 코요테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카트를 밀며 마음 놓고 사려고 해도 눈에 뜨이는 건 레토르트 곰탕 국물이거나 라면 종류였다. 호주산 소고기 양념 불고기를 1kg 샀다. B군보다 형편없이 맛없는 사과와 바나나도 샀다. 식빵이 1+1이라 케첩과 마요네즈 발라 먹으려고 샀는데 계산원이 케첩과 마요네즈도 1+1이라고 해서 달려가 가져왔다. 더는 필요 없는데 공짜라 챙겼다. 집에 와서 보니 전자 모기향 사는 걸 잊었다. 메모까지 해놓고 메모장을 열어보지 않은 거였다. 불감당이다.


한 달 동안 인스턴트식품으로 버티긴 어려울 거다. 자신 있는 오이지라도 담아야 할까. 집에서는 다른 반찬은 손대지 않아도 늘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한 가지 반찬으로 며칠 밥 먹는 희한한 식성이지만 독거 살이에선 한 가지 반찬이 금방 물린다. 색다른 건 만들기 성가시니 정말 시장이 반찬이다. 뭘 하다 때가 지나 배고프면 아무거나 먹어도 맛을 분별할 형편이 아니다. 반찬가게를 가끔 이용하기로 한다. 돈 아끼려다 영양 결핍 걸리겠다.


날이 덥긴 해도 빨래는 잘 마른다. 집에 돌아와 세탁기 돌려도 한나절이면 금세 마른다. 술을 먹지 않아 땀은 덜 흘려도 여전히 덥다. 찜탕 같은 조림지에서 풀베기를 했다. 팔뚝의 모공마다 물집이 생겼다. 물 뜨러 내려간 동료가 줄에 묶은 페트병을 던지면 1.8리터를 단숨에 비웠다. 작업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열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뉴스가 떴다. 그해 가을 초입에 9•11 테러가 터졌다. 열기에 삶아진 몸을 기대고 유엔 빌딩이 주저앉는 걸 멀거니 바라봤다. 여름은 오기 전인데 벌써부터 엄살이다. 그래도 더운 건 데서 일하는 사람에겐 고통이다. 섬의 일자리 공고를 검색하니 거주 연한에 따라 가산점이 붙는다. 이십 년 이상이 30점이고 나 같은 신입 주민은 5점이다. 그나마 1~2개월짜리에다 어떤 건 주 이틀 근무도 있다. 실업자가 많은 탓일까. 적은 일자리에 사람이 몰리고 선발 요건도 문턱이 높다. 산이 많은 B군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가면 짐을 죄다 버리기로 한다. 버리고 버려도 남은 책과 파일, 몇 년째 처박힌 조경 재료 등 앞으로도 쓸 일 없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한다. 내게 쓸모없는 건 남한테 주어도 쓸모없다. 캠핑 장비와 미술도구, 수영 장비만 챙긴다. 살면서 비우고 쓸데없는 구매는 피한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날 때 짐조차 버거우면 남은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한다. 이번에 장만한 독거 살림은 꽁꽁 싸맸다가 다음에 쓰면 된다.


어제 화실에서 본 미술 책의 그림에 꽂혀 집에 오자마자 파브리아노 종이를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화판에 고정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대상에 꽂히면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손을 댔다가 이내 절망한다. 표현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그래도 끝까지 그려 나간다. 실패한 삶이 없듯이 실패한 그림도 없다. 삶은 성공과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얼마나 풍성하게 삶을 경험했느냐의 문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린 그림이 곧 나의 삶이다. 그리는 과정은 언제나 설레고 즐겁다. 화실에 나가면서부터 숙제처럼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됐다. 집에 가면 천천히 꼼꼼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화실 동료의 그림 작업을 보면서 그림 앞에서 주저하는 그들의 고민을 엿살피며 많은 걸 배웠다. 그들은 다양한 주제와 시도로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만들어간다. 기법에 관한 한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그것을 터득하는 즐거움은 무엇에 견줄 바 아니다. 생각하며 꾸준히 그리는 게 창작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길이다. 무지 혹은 자기기만의 태도로

실존을 대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음악만 알고 그림만 알고 글만 안다면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예술은 소외된 것들과 약자에게 복무해야 하며 삶의 깊은 우울과 도락을 다루는 것이라고 믿는다.


회화로서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미의식이란 천차만별이지만 작품을 대하는 인식의 범위가 삶의 사유와 밀접하다는 걸 느꼈다. 아는 만큼 느끼겠지만 앎은 노력과 사색의 결과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다. 인간은 또한 밤하늘의 별을 볼 때도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예술을 찾고 예술을 추구한다. 예술은 삶에게 위로와 감동을 선사하는 불후의 장르다.


입맛 없는 날 오이 사다 새뜻한 입맛 돋우는 오이지를 담아야겠다. 찬물에 밥 말아 오이지무침만 먹어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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