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인 Jun 02. 2022

 단상

단상


뜨겁다. 그늘이라곤 찾을 수 없어 도로 수영장 주차장으로 갔다. 느티나무 아래 차 세우고 의자를 제쳤다. 조금 전 장승포 방파제 위 산에 있는 공원에 다녀왔다. 멀리서 보이는 곳인데 한 번 가보지 않았다. 얼마 후 떠나려니 가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배에 힘주고 셀카 몇 장 찍어 집에 보냈다.


 테트라포드 사이 갯메꽃이 소담스레 피었다. 꽃잎의 연분흥 색깔이 진한 보라색의 나팔꽃보다 연해서 보기 좋다. 내륙의 메꽃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나무 터널이 그늘을 만들어 시원했다. 계단에 앉아 바다를 보았다.  통통통 고깃배가 연이어 출항한다. 눈앞의 동백섬으로 가는 유람선도 방송 안내를 하며 물살을 가른다. 돈나무가 바다를 배경으로 노란 꽃을 피웠다. 자디잔 꽃은 얼핏 보면 인동꽃을 닮았다. 공원은 가파른 산자락을 깎아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바다 쪽으로 정자가 있는데 노인 둘이 눕거니  앉거니 차지하고 있다. 한낮으로 달리는 뜨거운 햇볕에 산책 나온 사람은 없었다. 매일 수영장 샤워실로 목욕하러 오는 노인이나 공원 정자에서 더위를 식히는 노인들은 갈 데가 없다. 집에 틀어박히거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을 배회한다.


나는 지금 수영장 관리인 박 씨를 기다리는 중이다. 전부터 얘기하던 근처의 순대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문화원 화실에서 회원들과 매주 화•금요일 도시락 먹는 것 외에 밖에서 누구와 점심을 먹는 건 두 번째다. 처음은 수영 고수 K와 장어탕을 먹었다. 혼자 외식을 하지 않아 섬에 내려와서 외식은 T시에 갔을 때를 빼면 전무하다. 매식은 기대보다 입맛의 가성비가 낮아 꺼린다. 박 씨는 동년배라 처음부터 죽이 맞았다. 섬에서 잘 나가는 중국집을 하는 처남이 살아 퇴직 후 아내와 함께 내려왔다. 그는 안산에서 오래 살았는데 연말에 일이 끝나면 도로 올라갈 생각이다.


땡볕 피할 데가 없어 수영장 주차장에 다시 가서 박 씨를 기다렸다. 수영장이 붙은 호텔 앞이 장승포항이다. 바다는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시퍼런 물결을 잔잔히 뭍으로 밀어냈다. 올여름이 얼마나 더울지 벌써 겁이 날 지경이다. 호텔 카페 앞에는 해수욕장 안전요원을 모집하는 플래카드가 더운 바람에 흔들린다. 옆에는 속성 안전요원 교육이 붙었다. 솔깃하지만 나이를 헤아리다 마음을 접었다. 나이 먹다 보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청년이 할 일을 장년 노인들이 한다면 사회는 제 물살을 타지 못할 거다. 분수와 격은 나이가 아니라 그릇의 차고 모자람에 있기도 하다. 엉뚱한 감투를 쓰고 분에 넘치는 일을 하려니 두서가 어설픈 사람은 쌔고 쌨다.


책벌레 간서치(看書癡) 이덕무는 사람의 급수를 매겨 이렇게 말했다.

'사물을 궁구 하며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며 역사의 반성과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일급이요, 남의 말을 경청하여 마음에 곱새기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이 급이요, 반성과 성찰 없이 독서도 하지 않고 남의 말에 손뼉 치고 웃어주며 비위나 맞추는 사람은 삼 급이라. 삼 급에 속하는 사람은 따로 시간 내어 만날 필요도 없는 인간이다'

나는 몇 급에 속할까.


섬을 떠나면 다시 오지 못할 거다. 정해놓고 내려올 만한 인연이 없으면 죽기까지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여기뿐인가. 좁은 한반도의 역사는 강변의 모래알 같은 사람들의 명멸로 새겨졌다. 쉼 없이 흐르는 물과 시간은 강돌을 닳게 하고 수목의 껍질이 쇠하고 세월도 녹슬게 한다. 무엇이든 영원한 건 없는데 인간의 머릿속에 박힌 관념의 족쇄는 얼마나 질기고 사나운가. 지나고 쌓이면 역사가 되는 사사로운 일상은 거대한 탁류에 휩쓸려 한 알의 모래로 바스러진다. 누가 탁류에 뛰어들어 물길을 거스를 수 있나.

'서불진언(書不盡言) 언불진의(言不盡意)'라는 말이 있다.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잡문으로 마음을 도려내고 공중에 흩어지는 말로 정신을 벼린 들 장구한 세월을 후려치는 찬물 한 그릇에 미치지 못할 거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작가의 이전글 도꺼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