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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08. 2022

도꺼 일기

一人暮らし(61)


에스노 그래피 (ethnography)는 일반 사회와 문화의 여러 가지 현상을 정량적이고 정성적인 조사 기법을 이용한 현장 조사를 통하여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ethno는 영어로 인종(race), 민족(nation)을 뜻한다. 에스노 그래피는 다른 의미로 인류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범박하게 말해서 인류사에 걸쳐 모든 지역의 문화를 포괄한다. 단순히 일상을 의미하지만 그저 생로병사와 의식주에 국한하는 게 아니라 각 지역, 민족의 상징체계를 이해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학문적 접근은 차치하고 쉽게 말해 인간- story라고 이해하면 될까.


사회 현상의 흐름을 보면 그 사회의 가치를 알 수 있다. 돈과 정력은 안락한 생존의 보장과 쾌락이 목적이다. 권력은 앞의 두 가지를 가능케 하는 열쇠지만, 역으로 돈이 권력과 동일한 위계에 놓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광고를 보면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가치와 삶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 에스노 그래피는 여기에서 데이터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 조사와 분석은 심층 면접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회의 외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내면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다분히 절망적인 상태로 치닫고 있다는 걸 느낀다. 정치는 블랙 코미디가 되었고 일상은 후퇴했다.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지는 존재다. 동물의 인식과 인간의 그것과 다른 점은 상상이라는 공간이다. 신화나 종교, 신은 상상의 결과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과 달리 상상은 생명력을 갖는다. 상상이 창조로 통하는 건 역사가 증명한다. 연역적인 사고로는 상상도 절망의 한 부분이고 생멸의 존재가 느끼는 공허는 희망을 부재의 대상으로 바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건 허구의 생명력을 믿는 때문이다. 영속을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가족으로 출발해서 친지와 지인, 공동체의 행복을 바란다. 생존에 대한 안전과 절망의 사냥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인데 문제는 욕구를 넘어선 욕망, 탐욕이 언제나 부조화를 이룬다. 탐(貪)•진(嗔)•치(癡)는 부조리한 삶의 전제 조건이다. 인간의 내면과 심리를 제어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양식(良識)인데, 그것은 기대 말고는 통제할 수 없고 대신 법과 제도, 상식의 패러다임이 그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인류사의 관점에서 우리는 어디쯤 위치하나.

기후 변화와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에 생태는 약탈을 거듭하여 쇠진한 상태에 도달했다. 이성적인 사고로 과학이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공포로부터 비롯된 허구적 상상이다. 인류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공멸의 시간을 어떻게든 늦춰보는 것이다.


섬을 먹여 살린 건 섬의 살과 피다. 어쨌거나 몸을 덜어 섬에 서식하는 동식물, 인간 등속을 꾸준히 길렀다. 도서(島嶼)의 지형 지리적 환경은 뭍과 떨어진 섬에 사람을 가두기도 하고 뭍으로 보내기도 한다. 「울릉도 오디세이」를 쓴 인류학자 전경수는 섬을 영토 주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대결과 착취의 관점만 남게 된다고 했다. 인류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공생하는 살림살이의 논리로 섬의 문화 주권을 생각해야 한다. 유배의 섬 거제도는 한국 전쟁 때는 난리를 피해 건너온 피난민을 품어주었고 포로들을 먹여 살렸다. 산업 부흥기에는 조선소가 생겨 수많은 선박 노동자들이 섬의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원주민의 삶 속에 스민 이주민은 조금씩 섬과 동화되며 일상을 꾸렸다. 현대의 특징이랄 것도 없는 변화는 이주와 정주의 섞임이다. 크게 보면 초록 행성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이 그러하다.


섬에서 반년을 놀고먹었다.

섬을 떠나며 흔히 보던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 박힌다.

나는 장승포와 능포 거리의 후박나무 가로수를 잊지 못한다. 한겨울에도 시푸른 바다의 입술처럼 찬바람을 견디던 후박나무는 봄이 오자마자 피돌기를 시작해 움을 틔우고 새 잎을 밀어냈다. 조금 환한 연둣빛으로 불 켠 듯 꽃을 달고 햇볕이 따가울 때는 마치 한여름의 녹음을 연상케 하는 그늘을 만들었다. 사철 새 옷을 갈아입는 수목의 일상은 개미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의 등짝에도 어둠과 빛을 쪼여준다. '시체가 묻힌' 나무 아래 걷고 난분분하는 꽃길을 걸으며 짭조름한 바다의 냄새를 마시는 게 섬사람의 일상이다.


시절이 바뀌고 산천의 수목이 쇠해도 벚나무 길의 사람들은 걷고 걸을 거다. 주름이 늘고 허리가 굽으면 새로운 사람들이 따라 걷고 늙은 나무는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것이 일상의 에스노 그래피고 역사고 문화다. 거기에는 사랑과 증오, 배신과 의리, 질투와 공생, 연대와 공멸의 라마가 끝없이 펼쳐진다.

나는 수영장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섬에 내려와 정초부터 물을 튀기며 매일 보던 수영인들. 고수들은 내게 격려와 상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수영하다 물보다 관심을 더 많이 마셨다. 내륙에서 이십오 미터를 헐떡이던 실력이 반년만에 십 리 장거리 수영을 주파했다. 에드몬 단테스의 무인도나 악명 높은 감옥 알카트라즈 섬이라도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꿈은 지리멸렬한 일상의 탈출인데 실은 지리멸렬이 내 삶의 실체다.


나는 또한 문화원 화실의 화가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다.

하얀 종이 위에 자신의 열정과 정념을 덧칠하는 그들의 손길을 기억한다. 회화에 대한 표현 욕구에는 오래된 욕망의 시원(始原)이 담겨 있다. 화가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오래된 꿈과 이상을 엿살핀다. 꽃과 풍경, 숲과 물, 채색된 자신의 얼굴에서 삶과 죽음의 열락을 느낀다. 유한성의 존재인 인간은 영원의 희구를 종교와 예술에 담았다. 누구의 삶도 하찮은 건 없으며 누구의 작품도 저열한 건 없다. 고매하거나 질박한 대로 꾸밈없이 수수한 게 자신이다. 그들의 작품에 대한 치열한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로에 대한 정 깊음과 배려, 그들과 보낸 추억은 오래도록 되감기 할 덕목이다. 스치는 인연에 대한 관심과 온기를 잊지 못한다. 아, 그리고 나의 정신과 몸을 씻겨주던 문화원 뒤란의 수목들은 내겐 유산과 같은 가치로 새겨졌다. 구석에서 '나 여기 있어요!' 외치듯 꽃을 단 섬초롱꽃과 초여름 문화원 옥상에서 따 먹은 비파 열매의 단물 넘치는 맛은 남도의 새뜻한 별미였다.


나는 아침마다 섬의 고요를 찢어놓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한밤중 고양이의 날카로운 비명을 잊지 못한다. 잠결에 깊은 주름을 파놓은 새와 고양이는 섬의 하늘과 골목을 점령하고 산다. 하늘과 골목은 그들의 영토이자 에스노 그래피다. 거기에는 그저 시끄러운 새소리와 털을 세운 짐승의 몸짓이 아닌 일상의 혈맥이 뛰고 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해초, 바위에 붙은 석화(石花), 어두컴한 삼나무 숲길, 바위 위에 돌올(突兀)한 기상처럼 서 있는 등대는 사물과 무생물을 초월하는 일상의 목록이다.


섬사람과 섬의 에 깃든 사랑에의 집념과 덧없음을 기억한다.

사랑은 생명이고 또한 죽음으로 통하는 터널이다. 누구도 거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섬은 사랑이고 생명이고 죽음이고 추락이다.

권 운동가 엘리 위젤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과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비겁한 자들의 머리에는 '자기 이익'이라는 신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비겁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거울을 소유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끊임없이 타인의 이미지에 탐닉하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말하고 비슷한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관계와 소통은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다. 마음의 지형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 또한 인생의 목적은 아니다. 인간은 홀로 살다 홀로 떠난다.

 어느 날, 루쉰(鲁迅)의 희망인 새로운 길이 아닌 내륙의 진부한 시골길을 걷다 문득 떠오른 섬의 기억은 몸에 새긴 문신처럼 종내 나를 따라다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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