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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09. 2022

도꺼 일기

一人暮らし(62)


이른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 갔다.

퇴근하는 차가 꼬리를 물고 길을 막는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자전거가 초여름의 풍경을 채운다. 한반도의 섬 끝에서 러시아워를 경험하다니 느낌이 새롭다. 제약회사 광고회사에 다닐 때는 강남에서 강북으로 출퇴근했다. 퇴근길은 지옥이었다. 트렁크에 늘 낚시가방을 싣고 다녔다. 길이 막히고 마음이 동하면 집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고속도로를 탔다. 용인에서 빠져나가 경안천 물가에 차를 세우고 낚시를 하다 밤 아홉 시에 집으로 향했다. 당시 경안천 물 사정이 나쁜 편은 아니었고 떡밥을 달아 던지면 뼘치만 한 참붕어가 힘을 쓰며 달려 나왔다. 일과 낚시를 밥처럼 병행하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성이 안 차 주말에는 다른 광고회사 후배들을 낚시터로 끌고 다녔다. 광고회사 동아리 회장을 하며 IMF 직전의 호시절을 맘껏 호흡하던 무렵이었다.


도시의 생활은 주말마다 들로 산으로 물길을 찾아 헤매는 게 주된 일상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생각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매일 사무실에서 프레스센터로 외근 나가는 게 정형화된 업무라 점심은 종로통에서 먹고 인사동 갤러리를 순례하는 게 코스처럼 되었다. 전시회 도록을 모으고 다녔다. 시청에서 하는 사군자 강좌에도 나가서 난을 그리기도 했다. 붓에 먹을 듬뿍 적셔 농담(濃淡)을 쓱쓱 표현하는 시립대 여교수의 붓질에 감탄하기도 했다.  중앙아트센터에서 유화를 배우려고 재료 일습을 구입하고 나갔다가 두 번만에 발을 끊었다. 일과 술이 문제였는데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유화 물감으로 자유로의 수로 낚시터와 처가의 시골 풍경을 그린 게 다였다.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동안 유화 재료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왜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곰곰 생각하지만 논리적인 말로 이유를 늘어놓긴 그렇다.

풍경과 사물에 대한 표현은 본능적인 욕구다. 원시 인류는 자신들의 일상을 동굴의 벽화나 사원의 벽에 그림이나 형상으로 남겼다. 마음의 표현은 꿈과 이상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일상의 바람이나 내면의 충동을 밖으로 쏟아내기 위해 문학과 음악, 미술과 춤 등 예술을 사용해 왔다. 나는 표현하고 싶은 대상은 있지만 아직 초보 단계라 기법에 몰두하는 편이다. 가끔 그리고 싶은 대상에 꽂히면 서투른 붓질로 종이를 채우기도 하지만 만족하는 경우는 드물다. 에곤 실라의 관능적 누드화나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건 삶에 대한 위선'이라고 말한 판화가 케테 콜비츠의 현실 묘사를 꿈꾸지만 꿈으로 존재하는 그림에 대한 로망이다.


예술의 재능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일생을 살면서 그것을 발현하는 기회를 갖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혈족의 DNA를 따랐다면 나는 음악이 맞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서양 음악을 했고 덕분에 음악을 전공한 형제와 외국에서 연주 활동을 하는 조카가 있다. 생전에 할머니는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 원주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횡성의 친정집에서 두 달여 지낸 적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선친의 배려였다. 할머니는 소학교 육 학년 무렵이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꾀꼬리 같았다고 했다. 윤심덕은 1926년 연인 김우진과 함께 일본에서 돌아오던 중 현해탄에 뛰어들어 정사(情死)했다. 횡성의 갑부였던 할머니 집안은 한국전쟁 때 풍비박산이 났다. 줄리어드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한 조카가 대관령 국제음악회에 왔을 때 나는 강릉에 살았지만 가보지 못했다. 아들은 음악교육과를 나왔다. 과를 선택했을 때 피는 못 속인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환쟁이 집안에서 환쟁이가 나온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인간의 능력은 의지와 맞물려 튀어나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를 떠나 시골 살이를 시작하면서 고단한 밥벌이가 시작되었고 내륙을 떠나 다시 강원도의 바닷가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 아이들의 발목이 굵어진 만큼 나도 나이 들었다. 어느 해 겨울 동안 많은 그림을 그렸다. 나중 헤아리니 오십 여편 그렸는데 그때 그림에 대한 솟구치는 열정을 쏟아낸 것 같기도 하다. 이후 그림은 차츰 멀어졌고 추억처럼 떠오르는 대상이 되었다.


도시를 떠나면서 시를 쓰고 작가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지만 현실의 궁핍은 늘 동무처럼 따라다녔다. 시집을 내고 시인 행세를 하는 게 부끄러운 날이 많아졌다. 문학 모임이 끝나면 산판에서 나무를 베고 아연 광산에서 광차를 밀었다. 지금은 산문을 주로 쓰지만 글로 말을, 말로써 마음을 표현하기란 정말 어려운 거란 깨달음이다. 섬에 내려와 다시 경험하지 못할 거란 생각으로 화실에 나가고 도서관에 간다. 어반 스케치 강좌를 처음 나가고 내심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선생에게 하나라도 배울 요량으로 두 번째 행보를 결행한 거였다.


일찍 도착해 선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초빙 교수로 먼길을 달려온 선생은 내게 대뜸 그림 동아리 참여를 제안했다. 말이 너무 빨라 끊을 수 없었다가 난 잠깐 섬 살이로 내려온 처지라고 했다. 그래도 선생은 원격 참여도 가능하다며 여운을 남긴다. 강의 시간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수강 인원은 처음의 반 이상 줄었다. 더구나 남자는 나뿐이다. 이런, 역시 미술은 남자의 성벽과 먼 세계인가. 아니면 지금도 어디에서 일과 후 밥벌이의 연장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느라 바쁜가.


선생은 학생들에게 어두워지기 전에 창밖의 나무를 스케치해 보라고 주문했다.

쓱쓱 삭삭 학생들은 도서관 앞뜰의 소나무와 길가의 은행나무 등을 그리기 시작한다. 난 소나무를 얼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살피기 시작했다. 표현이 뛰어난 사람, 선의 묘사가 섬세한 사람, 대상의 윤곽을 그리고 머뭇거리는 사람 등 각색이지만 모두 열심이다. 선생은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작품에 꼼꼼하게 지적해준다. 초여름 조용한 강의실에 연필 소리가 잔잔하게 퍼진다.


나는 집에서 급하게 스케치한 것들을 내보이며 지적할 곳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선생은 스케치북을 찬찬히 보더니 학생들을 향해 펼쳐 보인다.

'여러분, 여기 와서 보세요!'

학생들이 우르르 내 자리로 모여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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