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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11. 2022

단상

단상


섬에서 섬으로 건너갔다.

유월의 후텁한 공기가 산마루의 전시실을 감싸고 지나간다. 오르막 입구의 치자나무가 하얀 솜 같은 꽃을 달았다. 앞서가던 H 씨가 코를 대고 향기를 마신다. 키 작은 동백은 이미 열매를 숙성 중이다. 멀리 조선소의 크레인과 수제비처럼 둥둥 뜬 섬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일상에 스민 곳이다.


S선생의 수채화전이다.

통유리가 빙 둘러진 전시실을 돌아가며 그림이 놓였다.

일몰과 일출, 밤 풍경을 표현한 작품의 면면이 G섬의 바다를 주제로 펼쳐진다. 원하는 장면을 얻으려 많은 시간과 노숙을 감행하며 그린 작품이다. 색은 빛과 공기의 흐름,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마술을 부린다. 그것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이 한 장의 종이 위에 물감으로 번진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산과 바다의 조화가 보는 이에게 평온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풍경 속의 일상을 꾸리는 사람의 운명을 곰곰 가늠하게 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물과 자연을 대상으로 무한한 예술혼을 발현하지만 실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창작의 결과는 생태와 인간을 포섭하는 스토리이다. 히노마루(日の丸)를 연상케 하는 붉은 해, 남해의 물빛을 물어뜯는 사자 바위, 대금산의 일몰, 홍포의 풍경,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다본 남도의 첩첩 산의 풍경은 우주의 일부분인 자연과 인간의 찰나적 생존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몇 해 전 구례에서 차로 달린 섬진강의 풍경은 눈이 아프도록 아름다웠다. 순하게 굽은 소의 잔등 같은 남도의 산골짜기마다 핏빛 역사의 상처가 스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지난한 삶을 살아왔다.


고성의 갤러리에서 만난 화가는 화선지에 점을 찍어 자연을 돌출시켰다. 'Nature from Dot' 전에서 서울서 광고 사진을 찍었다는 노회한 사진작가와 화가랑 셋이서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다. 화가는 다음엔 G섬에 건너가 섬의 바다 풍경을 그리겠다고 했다. 눈빛이 형형해서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사진작가는 고향이 통영인데 이젠 일상의 바다에는 물렸다고 하면서 태풍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카메라를 들고 바다에 나가겠다고 했다. 조금 이해가 갔다. 바다에서 떨어진 내륙이 고향인 화가는 자꾸 떠오르는 대상이 뭍의 산과 들에 꽂혀 애를 먹는다고 했다. 난 그녀에게 사진 선생의 모어(母語)는 바다이고, 선생의 모어는 산이라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고 했다. 인간은 저주하는 고향일수록 피와 살에 스민 태생의 환경을 씻어낼 수는 없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균•쇠」에서 각국의 빈부 격차와 불평등과 대륙간 인류의 역사가 달라진 이유는 '사람들의 타고난(인종)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라고 말한다. 백인들의 노예제와 아리안 혈통의 우수성을 앞세워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와 인간을 등급으로 나누어 침략, 학살한 일본의 경우도 제국주의에 대한 변명과 핑계에 불과하다. 무엇도 인간을 위계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채화의 기본을 배우는 중이라 그런지 붓질과 조색에 눈길이 갔다. 점 선 면의 스킬에선 수채화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터치를 유심히 관찰했다. 머릿속으로의 상상에서 현실의 구체적 행위가 핍진한 상황을 연출한다고 믿는 것처럼, 작품을 들여다볼수록 작가의 고민과 욕망이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건 삶에 대한 위선이다'라고 말한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는 치열한 사유와 현실새겼다.


좀 더 들어가면 꽃과 낙조에서도 미의식과 이상은 사람마다 다른 사유를 끌어낸다고 생각한다. 꽃의 개화와 시듦, 삶의 풍요와 추락은 삶과 죽음처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활짝 핀 꽃에서 삶의 희열과 도락을 경험할 수 있는 동시에 죽음과 적멸을 읽어내는 것이다.


섬의 섬에 들어가 마주한 작품은 바다와 삶에 대한 사유를 되돌아보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돌아가는 길 죽 뻗은 바다와 다르게 내륙의 삐죽삐죽 솟은 산들이 무시로 가슴을 후벼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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