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경우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 과정을 거친다.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과정은 복잡하고 험난하다. 취미로 즐긴다면 즐기는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심화나 전문 과정에 들어서는 건 개인의 자유 의지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즐기는 데는 반쯤 미쳐야 제대로 즐긴다는 말은 대상에 대한 몰입의 정도를 말하는 것일 거다.
수영의 영법 중에서도 자유형을 배우고 싶었다. 동해안에서 십오 년 살면서 여름마다 물속에 들어가 조개와 갯것을 잡았다. 스노클 물안경을 쓰고 빨대로 호흡하며 물 바닥을 유영하는 재미는 육상의 그것과는 색다른 흥미를 일으켰다. 길어야 삼사십 초 내외의 자맥질을 하면서 들여다본 바닷속은 별천지였다. 물살에 따라 하늘대며 움직이는 해초 숲에 숨은 물고기, 물 바위에 붙은 멍게의 활짝 핀 숨구멍은 그대로 만개한 꽃이었다. 작살로 생선을 잡고 문어를 잡았다. 모래를 파서 조개를 잡아 구리 동전을 넣고 하룻밤 해감하면 다음날 아침 시원한 조개탕을 먹을 수 있었다. 볕 좋은 날엔 막 따온 미역 다시마를 널어 말렸다. 십 년 이상 물질을 하면서 느낀 건 바다 생태의 변화가 생각보다 속도가 빠른 거였다. 기후 온난화와 바다로 유입되는 민물의 오염, 그리고 여름철 관광객의 무분별한 해루질로 인한 피해였다. 수초가 사라지는 백화현상은 해안 전역에서 진행되어 어류의 산란지와 서식처가 사라지고 밤송이 같은 성게가 점령했다.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때 엄청났던 자연산 섭(홍합)은 자라기가 무섭게 따버려 이젠 새끼들만 바위에 붙어 연명할 정도다.
스노클링은 수영 실력과는 상관없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수중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레포츠다. 하지만 장비가 유실되거나 급한 상황에는 생존 영법이나 물에서 나오는 영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영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작년 시월 말부터 B군에 처음으로 생긴 실내 수영장에 나갔다. 코로나가 숙지자 재개방한 수영장의 시설은 훌륭했지만 거리두기로 강습은 폐쇄되었다. 급한 대로 유튜브를 보며 영법의 기초를 눈으로 배우고 풀에 들어가 팔다리를 흔들었다. 엉성한 동작으로 물을 먹기 일쑤고 호흡은 되지 않아 레인 25미터를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멈춰 서고 물을 거푸 마셨다. 악착같이 연말 동안 일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영하의 어두운 길을 더듬어 수영장에 다닌 끝에 가까스로 이십오 미터 수영을 할 수 있게 됐다. 호흡은 여전히 터지지 않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연말이 되고 기간제 일은 종료되었다. 일월 초 짐을 싣고 남쪽을 향해 떠났다. 몇 개월 낯선 곳에서 쉬며 수영과 그림의 기초를 배우기로 한 거였다. 남쪽의 섬에 원룸을 구하고 수영장에 나갔으나 여기서도 강습은 없었다. 용감한 사람들 몇 이서 자유 수영을 하며 물을 튀기고 있었다. 섬의 수영인들은 최소 십 년 이상 수영을 해온 고수들이 즐비했다. 강습 레벨은 고급 아니면 연수반 수준의 실력이었다. 그들에 섞여 물을 찼다. 때때로 그들의 원 포인트 레슨을 받으면 고치려고 애썼다. 두어 달이 지나자 갑자기 호흡이 터졌다. 물론 이것도 단계적인 성찰이어서 호흡이 터졌다고 수영이 무한정 쉬워졌단 뜻은 아니다. 호흡이 터지니 이삼백 미터로 수영 거리가 늘었다. 동작이 완벽하지 않아 어깨가 아프고 집에 돌아가면 바로 쓰러져 한 시간을 잤다. 파스를 붙이는 날이 많아졌다. 아킬레스건 수술과 왼 어깨 인대 수술과 진행 중인 오른쪽 오금의 신경 혹, 그리고 오른손의 장애 등 나의 신체는 수영을 하기에는 부적절한 상태를 두루 갖춘 종합병원에 버금갔다. 오리발 레인에서 숏핀을 차고 수영했다.
삼 월로 접어들었을 때 오백 미터 자유형을 했다.
오백 미터 완영을 했다고 다음날 육백 칠백으로 거리가 느는 건 아니다. 다음날 자신 있게 물에 뛰어들었지만 삼백 미터 완주를 하고 헐떡이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시 어느 날 호흡이 편해졌고 내친김에 1km 수영을 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자유형 영법으로 일 키로를 가기까지 넉 달이 걸렸다. 그동안 무진 애를 쓰며 수영장을 들락거렸다. 매일 유튜브 강사의 코치를 눈에 새기고 풀에서 레인을 오가는 고수들의 동작을 끈질기게 관찰했다. 평영과 배영을 간간이 했지만 주종목은 자유형이었다. 일 키로 수영한 다음 주에 이 킬로를 나갔고 드디어 마음먹고 육십오 분 내리 수영해서 삼 키로를 완영 했다. 비로소 장거리 수영에 자신이 붙었다. 그러나 실내 수영장에서의 수영은 온실의 화초와 같다. 바다에서의 오픈 워터 수영은 파도 등 변수가 많다. 어쨌든 거리에 욕심을 내지 않고 일 킬로씩 끊어 수영을 즐겼는데 어깨 아픈 건 여전했다. 유튜브 검색을 하니 롤링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좌우로 어깨를 기울이는 롤링이 약해 뻣뻣한 어깨로 팔 꺾기를 하니 당연히 어깨에 무리가 온 거다. 동작을 의식하며 물을 누르고 턱을 글라이딩하는 어깨에 붙이고 팔꺾기를 하니 어깨 통증이 약해졌다. 획기적인 변화다.
수영은 할수록 어렵다. 나이 들어 수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몇 가지 도락 중에 수영을 끼워 넣은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멀지 않은 곳에 수영장이 있다면 수영은 사철 즐길 수 있다. 수영인으로서 동료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주변에 수영을 즐기거나 배우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물이 무섭다든지 시간이 없다든지 아니면 수영 따위엔 취미가 없든지 하는 거였다. 강요하거나 안내할 마음은 없다. 스스로 찾아가 발견하는 게 삶의 묘미 아닐까.
수영은 매력 있는 운동이다.
수영인 보니 추이(Bonnie Tsui)는 「수영의 이유」에서 '물에 들어가는 행위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다.'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생존 수영을 가르친다. 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물에 몸을 맡기는 게 일차적이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물의 중력에 대항해 구명조끼와 팔다리 동작으로 물에서 탈출하는 훈련이다. 어떤 학생은 물의 매력에 반해 본격적으로 수영을 배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릴 적에 형들을 따라다니며 저수지나 물 웅덩이에서 헤엄을 배웠다. 개헤엄부터 송장 헤엄 모자비 헤엄 등만 익혀도 물에서 놀기에 충분했다. 그 실력으로 이십 대에 친구들과 팔당에서 한강을 건넜고 한탄강을 건넜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고 물속 상황은 짐작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 인간은 헤엄쳐서 대양을 건넌다고 자랑하지만 실은 물의 표면을 스치는 소금쟁이에 불과하다. 의식의 내면과 같은 심연의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조개를 잡으러 자맥질을 할 때도 발목에 수중 칼을 찬다.
수영은 어렵고 힘들지만 할수록 흥미를 느낀다.
신체의 능력에 도전할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의 자기 검증을 즐기는 운동으로서 수영은 충분히 매력이 있다. 물에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는 불리한 삶의 조건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물질 조건이 아니라 향유하는 능력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맨몸으로 물에 뛰어드는 사람은 저항으로 순응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스스로 익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