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인 Jun 13. 2022

도꺼 일기

一人暮らし(64)


마트에서 마지막 라면을 샀다.

돌아가면 집에서 라면 끓일 일은 없을 거다. 독거 생활에 하루 세 끼 챙기는 게 고역이었다. 라면은 지방을 먹더라도 훌륭하게 한 끼를 해결해줬다. 라면이 처음 나올 무렵엔 라면에 김치와 국수, 콩나물을 넣어 부피를 불렸다. 형제들은 커다란 냄비에 얼굴을 박고 꼬불한 면발을 다퉜다.

계산하며 쌓인 포인트를 전부 써버렸다. 육 개월 동안 착실히 다닌 마트는 식료품을 조달했다. 다이소에서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샀다. 빈 박스를 주워 달랑달랑 부는 바람을 끼고 길을 건넜다. 그동안 모인 책과 인쇄물을 버릴 거다.


섬을 떠나려면 열흘 정도 남았다.

부러 반찬을 만들지 않고 있는 걸 다 소진하기로 했다. 멸치는 가져간다. 마른 멸치는 집에서도 먹는다. 수영장, 화실 사람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 한반도의 끝 섬에도 정 깊은 사람이 사는 걸 느꼈다. 섬사람과 섬의 풍경을 가슴에 담았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을까. 만나고 헤어지기에 삶은 얼마나 짧고 유한한가.

 아침에 원룸 주인이 텃밭에서 땄다며 방울만 한 복숭아랑 상추, 매실액과 매실주를 갖다 주었다. 손수 가꾸고 만든 귀한 먹거리다. 내일 화실에 갖고 갈 게 생겼다. 매주 두 번 화실에서의 점심은 생일상을 받는 것처럼 구쁘고 즐겁다. 함께 반찬을 나누고 밥을 먹으며 사는 얘기를 한다. 정이 깊어가는 순간이다.


짐은 조금씩 싼다.

집에 가서 방의 살림과 뒤란의 쓰지 않는 물건을 죄다 버리고 정리할 생각이다. 침대도 버리고 책과 책장도 버리고 섬에서 산 침대는 접이식이라 다음 가출 때도 요긴하니 들고 간다. 버리고 줄여서 최소한이라도 캠핑 장비와 미술도구, 옷 등이 한 짐이다.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을 뒤지거나 희망 도서를 신청하면 된다. 글은 휴대폰 메모장으로 쓰니 노트북은 필요 없다. 자꾸 비울 생각이다. 언젠가 붓을 놓고 한자리에 머물면 캠핑 장비도 버릴 거다. 비구처럼 사발과 수저, 몸을 가릴 옷 한 벌이면 족하다. 그때는 글도 버리고 휴대폰도 삭제한다. 섬을 떠나기도 삶을 뜨기도 번거로운 절차가 성가시다.


살면서 너무 많은 걸 걸치게 되었다.

섬에 내려와서 소식(素食)과 수영이 당을 절반으로 떨어뜨렸다. 뱃살은 편평해졌다. 자칫하면 오래 살겠다. 술을 안 마시고 적게 먹고 운동하니 몸이 편하다. 몸이 편하면 사유도 깊어진다. 먹방의 범람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탐욕과 파괴적 존재인지 실감했다. 미식(美食)은 탐식(貪食)의 다른 이름이다.


섬은 나를 살게 했다.

섬은 섬의 바다와 길, 바람과 햇살, 섬사람과 섬의 자연 모두를 포함한다. 그들이 날 품어주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대상은 가족과 타인, 생태와 우주를 망라한다. 그것들은 나를 살게 하고 죽게 한다. 때론 빚 지고 봉사한다. 짐승도 새끼를 핥아주고 먹인다. 새는 그것이 정인 줄 모르고 서로 부리를 비벼 온기를 나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 부른다. 인간만이 종종 포르노를 사랑이라 착각한다.


B 군의 산과 사람들도 나를 품었다. 골 깊은 산자락에서  사과 농사짓는 L 씨, 변함없이 보얀 빛깔의 막걸리를 빚는 P 씨. 근동에는 내가 좋아하는 선후배 작가들이 산다. 산신령 같은 허연 머리칼 날리며 연초 향 올리는 선배 작가, 바이러스를 뚫고 어김없이 뮤지컬을 연출한 D 형, 햇볕 투명한 날 천에 물들이는 동무, 나무로 둘러싸인 집에서 물감 개는 S 화가. 좋아하면서 몇 년에 한 번 얼굴을 본다.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투가리처럼 질박하지만 깊은 사람은 도처에 즐비하다. 못생긴 그릇들이 부딪쳐 화음과 불협화음을 만들며 세상을 가꾼다. 낮은 지붕이 모여 태풍을 견디고 장마에 휩쓸린다. 집에 돌아가 진부한 일상을 가꾸며 가슴에 품은 섬의 기억을 영양제처럼 하나씩 꺼내 일용하며 살 거다. 마당의 잡초를 뽑으며 섬의 풀을 떠올리고 체리나무를 돌보며 바닷가의 수목을 생각한다. 눈 아프게 들어와 박힌 바다의 물빛과 하늘은 오래 머물지 모른다. 다시 일을 찾고 내륙의 오염된 땅과 탁한 하늘,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꽃을 피우는 들풀 같이 중금속 섞인 강물의 돌 틈 꺽지처럼 소리 죽여 사는 거다. 잘 지내시라, 행복하시.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