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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24. 2022

잡문

杂文(313)


잠이 오지 않았다.

짐은 모조리 차에 싣고 방바닥에 요만 깔았다. 한숨 자고 깨면 바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털고 일어나 부스러기를 싣고 시동을 걸었다. 반년 살았던 섬의 공기가 풍경이 뒤로 쑥쑥 밀려간다. 거가대교를 지나니 어두운 밤에 조선소 불빛이 대낮 같다. 김해 쪽으로 해안의 불빛이 고흐의 그림처럼 바다에 비친다. 아름다운 섬, 아름다운 사람들과의 추억을 바리바리 싣고 내륙을 향해 달렸다.


추억은 인간의 살에 스미는가. 내륙으로 올라갈수록 지명에 따라 관계된 인연이 하나둘 떠오른다. 지금은 주소도 모르지만 한때는 더운 입김을 주고받았던 사람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내 운명에 역마살은 끼었어도 바람 살은 없다고 믿는데도 만났던 기억을 부르는 이들은 여성이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들은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을 세우며 치열하게 산 증인들이다. 남자는 그저 남자로 태어나 대접받고 중심에 섰다. 그들도 가족을 먹이기 위해 고투하는 건 물론이지만 젠더는 사회적 산물이다. 보봐르는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했잖은가. 남자도 펑펑 울 줄 알아야 하고 여자도 수 틀리면 싸대기를 올려붙여야 한다. 재고 빼거나 참고 넘어가는 건 사회의 습속에 길들인 탓이다.


이 년 가도 쓰지 않는 물건, 삼 년 동안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책은 버리는 게 낫다. 책장을 헐어 몇 권 남지 않은 책을 죄다 박스에 넣었다. P.A. 크롯폿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 제레미 힐의 「자연 자본」과 「루쉰전」, 지인 보낸 책은 살려두었다. P시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K시인은 책을 낼 때마다 잊지 않고 책을 보냈다. 최근에 낸 책은 나와 함께 섬에 다녀왔을 정도다. 해묵은 노트를 펼치니 중국어, 일본어를 공부한 흔적이 새삼스럽다.

P시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K시인은 책을 낼 때마다 책을 보냈다. 최근에 낸 책은 나와 함께 섬에 다녀왔을 정도다. 내일부터 틈 나는 대로 뒤란과 창고를 뒤져 조경 재료 등을 만주 군이 견벽청야하듯 쓸어 없앨 생각이다. 그러고도 예초기, 기계톱은 분신처럼 자리 잡을 거다. 시골에서 그것들은 남의 풀을 베거나 나무를 자르는 데 요긴하다.


시골 촌놈은 말이 짧다. 보고 배운 게 없으니 사람을 평가하는 데 세상의 가치로 매긴다. 툭툭 반말이니 짜증이 난다. 촌놈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불상놈의 버릇은 자리에 오를수록 개에게도 못 준다. 술 한잔을 나눌 친구가 없는 건 현실이다. 왕희지는 싹수가 없는 제자에겐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비인 부전(非人不傳)이다. 저런 놈이 사회 지도층이 되면 재앙도 보통 재앙이 아니다. 공감이 없으니 배려는 생색이고 연대는 위선이다. 오직 자신의 이익에 충성하는 똥 묻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외면이 상책이다. 세상은 저런 것들이 득세하면서 조져 놓기 일쑤다.


이웃집 아줌마가 오랜만이라며 반긴다. 가물어서 올 농사는 글렀단다. 감자 캘 날이 내일인데 알이 들지 않아 재미없단다. 그녀는 남편이 암으로 죽고 나서도 혼자서 비탈밭을 억척스레 일구며 산다. 오토바이와 경운기를 몰고 산길을 오르내린다. 다세대 주택과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읍내 변두리에서 유일하게 경운기 소리가 나는 동네다. 키가 크고 힘이 장사라 사내처럼 걱실하다. 도시에 사는 여동생이 찾아온 적 있는데 세련된 미인이라 놀랐다. 칠십 줄의 옆집 아줌마는 혼자서 농사지으며 사는 게 낙이다.


마당은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마치 다듬지 않은 정원이거나 소나기 맞은 풀밭 같았다. 아내가 꽃모종을 여기저기 심고 심지어 잔디가 벗겨진 데다 꽃을 심었다. 골목 밖 공터의 흙을 뒤집어 꽃과 호박, 토마토를 심어놓은 것도 아내의 솜씨 같다. 덕분에 좁은 마당 구석에 퇴비 포대와 연장, 모판이 함부로 굴러다닌다. 벌여놓고 정리는 뒷전인 게 아내의 특기고 하지 않으면서 깔끔 떠는 게 내 주종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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