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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인 Jun 20. 2022

도꺼 일기

一人暮らし(27)


강냉이죽


배고프면 밥 먹는다는 규칙을 세웠다.

그런데 원칙이 필요 없이 된 건 끼니가 지나면 배가 고파진다는 몸의 습관 때문이다. 내가 하루 세 끼를 먹게 된 건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였다. 아침에 밥을 든든히 먹고 종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놀다 해가지면 친구들은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서 놀았는지 형들은 흙이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고봉밥을 입에 욱여넣고 잠에 떨어졌다.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이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자 급식이 있었다. 집에 가봐야 먹을 게 없던 아이들에게 강냉이 죽을 나눠주었다. 군인 가족이라 제외됐던 나는 고소한 강냉이 죽을 먹기 위해 꾀를 짰다. 급식 당번을 자청하여 선생님께 칭찬받고 들통을 들고 소사실로 달려갔다. 소사 아저씨는 커다란 가마솥에 끓인 멀건 죽을 학급 별로 퍼주었다. 힘에 부치는 죽통을 양손으로 들고 교실로 가서 아이들의 그릇에 담는 일까지 도맡는다. 다 퍼주면 들통에 붙은 죽이 내 차지가 된다. 그걸 바가지로 긁어먹었다.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학년 가을에 예편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도시에서는 급식을 빵으로 주었는데 거무티티한 빵에서 오줌 지린내가 났다. 난 한 반에 네댓 명씩 섞인 고아원 아이들의 옥수수빵과 바꿔 먹었다. 고아원 아이가 가져온 옥수수빵이 훨씬 맛있었다. 한 번은 친한 고아원 아이와 고아원에 놀러 갔다. 친구는 모아둔 옥수수빵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가난이 주원인으로 버려지고 헤어졌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더럽고 냉정함을 일찍 깨우쳤다.



환상과 충동


점심 먹고 집을 나선다.

음습한 날이다. 볕 들지 않은 우중충한 하늘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한여름에도 껴입는 거지처럼 단단히 껴입고 나갔다. 흐린 날에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걷는다. 스치는 사람들의 대화엔 일상의 얘기가 스몄다. 여행이나 산책은 혼자가 낫다. 둘 이상은 깊은 사유가 틈 탈 공간이 힘들다. 세계관이란 주체가 자신 앞의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 또는 몇 가지의 이야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이 의미 있는 것으로, 욕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마음에 근거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세계관으로 욕망에 충실한다. 그렇다면 섬에 내려온 나는 욕망에 충실한 건가. 기간제 일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온 건 가족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솔직하게 내면을 드러내고 타협하기엔 평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무능과 비겁을 감추려다간 또 다른 사달을 낳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디 서고 피정(避靜)은 없다는 걸 잘 안다. 환경과 조건이 바뀌었다고 정신마저 말끔히 헹궈지진 않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쫓아오는 무의식은 종종 나를 괴롭혔는데, 잠에서 깬 기분조차 영 개운치 않다는 건 나의 불안한 내면을 반영한다. 지인은 용기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습속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개고생을 자처한 건 현실의 엄혹한 덕분이었는데, 잦은 다툼과 짜증이 직접적 요인은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집을 떠났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가피(加被)는 동일한 종교의  형제자매에만 국한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뭐 가족이 옳지 않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섬의 낯선 풍경에 보조를 맞추면서도 나를 지우려는 현실의 환상은 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충동과 환상의 지루한 간극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환상을 걷어낸 삶의 밑바닥을 흐르는 충동(욕망)의 발자국들은 행선지가 없다. 단지 그것이 구두 소리를 내기 때문에 즐거울 뿐이다. 바라는 건 집에 돌아가 가족을 다시 만나더라도 이전보다 겸손함으로 부드러워진 노력이 고결함으로 무장한 쌀쌀맞은 노력보다 우리를 훨씬 더 멀리 데려가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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