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인 Jul 07. 2022

단상

단상


작가는 도시 생활의 번잡을 피해 시골에 정착했다. 고요한 농촌의 아침과 벌레 소리로 깊어가는 밤의 사색을 즐기며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농촌의 속살은 기억에 남아 있는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농촌을 경험하며 상처를 목도하고 고민에 빠진다. 인간 사회란 도농을 떠나 모든 곳에 편재한 부조리의 늪에 잠긴 상황이란 걸 깨닫는다. 작가 장석주는 「나를 살리는 글쓰기」에서 농촌의 현실을 아프게 꼬집는다.


'시골에서 선량한 자연 친화주의나 지고지순한 순정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시골은 권태롭고 구태의연한 채 오래 방치되어 속수무책으로 쇠락의 기운에 짓눌린 또 다른 삶의 삭막한 현장이다. 이 낙후된 변방은 벌써 피해망상과 배타주의, 뻔뻔한 속물주의로 얼룩진 도시보다 더 끔찍하다. 관습적인 농약 사용과 폐비닐 방치로 죽어가는 땅, 이웃의 개들을 제초제 따위로 독살하는 비정한 뻔뻔함과 극악한 이기주의, 절망적인 퇴행과 정체로 뒤덮여 있다. 고향의 순정한 온정주의나 너그러움은 시골 어디에도 없다.  천만다행으로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기후들, 그리고 산, 물, 바람, 나무, 숲은 변방의 낙후와 무관하게 의연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사철 변화하면서 순환하는 의연한 자연에 기대 위로를 삼는다.

어디라고 예외는 드물 거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착한 마음과 순하고 어진 건 아니다. 그들도 속화된 욕망으로 탈 농촌을 꿈꾸거나 자식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채우지 못한 출세의 갈증을 노리는 사냥터의 흔해빠진 사냥꾼일 뿐이다.


위아래 가릴 것 없이 그들의 가치는 물적 재화의 팽창과 더불어 얻는 생활의 풍요와 안락에 기대는 바 크다. 삶의 목표는 현실에서의 성공이다. 사회적 위치, 재물의 과소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건 여느 지역과 대동소이하다. 더 큰 세상에서 삶의 행복을 위해 가치의 의미와 무의미를 치열하게 탐구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게 청년의 태도이나 역사와 시대 인식에는 관심이 멀어진 지 오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풍요로운 삶을 사느냐, 비굴한 밥을 벌며 희망을 접어둔 채 생존을 도모하는 부류가 있다. 삶의 가치를 상실한 노인은 공허한 말년의 일상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하직한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져 삶의 가치 상실은 우리 사회의 깊은 병징이 되었다. 비교당하지 않으려면 성공하거나 비가시적 존재로 살아야 한다. 이웃의 평범한 꿈, 평범한 일상이 존중받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농촌의 상인에게 친절한 응대는 기대하지 못한다  안 사면 묻지도 말고 돈 되지 않는 서비스는 귀찮아 사절이다. 물류의 유통이 일반화된 지 오래인데 읍과 도시의 상품 가격 격차는 여전하고 친절은 격차만큼 크다. 직업은 생존 전략이니 거기에 품격이나 교양이 들어설 여지는 오래전에 차단되었다. 한마디로 속악한 물욕이 팽배할 뿐이어서, 재삼재사 만나는 일은 갈수록 멀어져 농촌의 상권은 축소된다. 몇 개씩 들어선 마트에서 식료품과 술을 사는 정도고 가전제품이나 값나가는 상품은 도시로 나가거나 인터넷 쇼핑을 뒤지는 게 현명하게 되었다. 시골의 상권은 갈수록 쪼그라들어 유리창에 임대를 알리는 쪽지만 늘어난다. 벼슬아치인 공무원은 인근 도시의 말쑥한 아파트에서 자고 소읍으로 출근한다. 배릿한 풀 냄새에 거름 냄새가 섞인 아침 공기가 코를 자극한다.


섬에 살다 오니 내륙은 답답하다. 바다에 서면 탁 트인 수평선 너머 도망칠 구석이나 있지 여기선 사통팔달이라 달려도 초록의 연속이다. 산으로 막힌 풍경 위로 구름이 지나간다. 땅 냄새 맡은 벼 포기는 뿌리를 내리고 시커먼 초록 정장으로 갈아입을 채비다. 가물다 쏟아진 비로 말랐던 개울은 부연 흙탕물이 되어 흐른다. 윗마을 논밭의 퇴비가 섞인 물은 탁도를 더하며 중심 하천으로 모인다. 실개울에 버들치가 살아 있다. 사람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물여뀌 그늘 아래 숨는다. 빠르고 날렵한 게 정말 버드나무 이파리 닮았다. 사철 옷을 갈아입는 자연 속에서 농사짓고 꿈을 키우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밝았다 저물었다 한다.


고향이 시골이라니까 소 키우는 줄 안다는 건 옛날 얘기다. 읍, 면소재지에도 아파트가 빼곡하다. 들판에 농막을 지어놓고 아파트에서 자고 농사짓는 말년도 수두룩하다. 이국풍의 번듯한 집을 짓고 사는 외출용 농사용 차 따로 두고 사는 게 요즘 농촌 풍경이다. 내 땅 좀 갖고 사는 축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집을 보며 사는 사람의 형편을 가늠한다. 도시 나가 지지리 고생인 자식을 둔 부모는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산다. 기름값 무서워 겨울이면 연탄 가는 게 일이다. 할머니 혼자 살다 떠나면 집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까운 시일에 지도에서 없어지는 마을이 늘 거다. 고령화와 낙후된 의식주는 시골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직업에 따라 자식의 성공 여부에 따라 빈부가 나뉘고 삶이 고단하다. 그래도 마을회관은 노인의 일상을 챙기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에어컨 난방 공기청정기 운동기구를 갖추고 때마다 보건소에서 나와 혈압 당을 체크한다. 운동 요가는 물론이고 독거노인의 말동무도 해준다. 어느 마을의 노인에게 들었던 말이다. '노인들은 나라가 먹여 살리니더...'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니듯 노인에게 가난과 질병, 고독과 무위(無爲)는 최대의 적이다. 자식 자랑은 저무는 말년의 보상과 같다. 망했거나 별 볼일 없는 자식은 꽁꽁 숨긴다. 잘난 놈만 드러낸다.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없는 세대의 우울한 풍경이다.


내가 보고 느낀 시골의 자화상은 노인의 의식과 아래 세대의 의식이 놀랍게도 닮아 있다는 거다. 미디어와 sns가 거미줄처럼 깔린 시대에 새롭고 변화하는 모험보다 진부해도 안온한 생존을 도모하는 인식이 대세인 것 같다. 거기에다 철저한 가족이기주의가 물살을 타면 타인이 배제된 겉으로만 공동체인 농촌의 실상은 소름 끼치도록 무기력하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도시라고 다를 건 없다. 생존의 사냥터에서 어쩔 수 없이 체화된 삶의 패러다임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다양성과 함께 '내 멋대로'의 인생을 살기에 이르렀다. 남에게 신세 안 지고 폐 끼치지 않고 산다는 인생관은 언뜻 들으면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 같지만 뻔뻔한 개인주의에 불과하다. 상생보다 홀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던지는 세대에게 희망은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