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타이페이
타이중에서 타이페이로 돌아올 때 기분이 묘했다. 두 도시 모두 똑같이 낯선 곳인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버스가 타이페이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지하철 노선도를 발견했을 때, 일주일에 5번은 가는 기숙사 앞 밀크티 가게를 마주했을 때, 나는 집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익숙하고, 습관이 남아있고, 내가 있어야할 것만 같은 곳.
그러나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도시는 내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타이중으로 떠나기 전 타이페이의 체감 온도는 43도를 육박했다. 38도에 육박하는 기온과 말도 안되는 습도는 사람을 찜통 속의 만두로 만들어 버리는 날씨를 선사했다. 그러나 지금의 타이페이는 무척 춥다. 긴 셔츠 위에 가디건을 걸쳐도 좋을 정도로.
우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는 타이페이의 겨울이 슬슬 시작되고 있다. 장대비가 눈을 떴을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그리고 잠에 빠져있을 동안에도 계속 된다. 기숙사 방 밖으로 비 오는 소리가 끊임없다. 일기예보를 살펴보니 오늘도, 내일도, 내일 모레도, 아니 적어도 1주일 정도는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겨울 내내 비는 계속 찾아올 것이고.
그래도 서울에서는 곧 계절이 바뀐다는 힌트를 받곤 했었다. 갑자기 찾아온 청량한 가을 아침이라던지, 어디선가 나기 시작하는 겨울 냄새라던지, 슬슬 올라오는 아스팔트의 열기라던지. 곧 다가올 계절을 맞을 준비 기간이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유독 그 환절기를 좋아했다. 떠나는 계절을 배웅하고 다가올 계절에게 환영 인사를 하는 기간. 어느 계절로도 정해지지 않는 그 애매한 시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타이페이에서는 환절기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환절'일' 정도 되려나. 어제까지만 해도 더워서 에어컨 없이는 잠에 들 수 없었는데 오늘은 에어컨을 켜면 추워서 잠에 못 들 지경이다. 이렇게 빠르게, 준비할 틈도 없이, 인사를 치룰 새도 없이 바뀐 계절이 성큼 와 있다.
날씨와 함께 타이페이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나 역시 생각에 잠긴다. 도시를 탐험하고, 적응하고, 일상을 구축하느라 여념이 없던 시간들이 지났다. 안개에 쌓인듯 불분명하던 도시는 제법 손에 잡히고 어딘가 붕 뜬 듯했던 두 발도 현실의 땅을 밟았다. 이제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도 하지 않는 것이 이곳에서 시간을 나는 최선의 방법일지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는 충만해진다는 것이고, 나쁜 의미로는 질식해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포장지를 뜯고 나와 현실이 되는 순간 생각은 자연히 많아지고 충만과 질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곤 한다. 보통 질식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이페이에서의 생각들이 나를 질식시키기보다 충만하게 하기를 바란다. 준비 기간없이 순식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이 조금은 놀랍고 버겁다. 내일부터 다시 숨을 천천히 들이키며 이 많은 생각들을 열심히 운영해봐야지, 더 충만해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