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커튼을 통과해 은은하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세면대 앞에 섰다. 세수만 하고 산책을 나가야겠다 마음먹었으면서, 그새를 못 참고 욕실의 작은 창문을 열어 올리고 바깥공기를 들이마셨다. 멍하게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면서 양치를 하던 중, 문득 자그레브의 단아했던 에어비앤비 욕실과 주인의 욕실 용품들이 무질서의 질서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선반이 떠올랐다. 그때 그 아침에도, 고운 자수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살이 참 예뻤는데.
계란과 간장이 떨어져 동네 마트에 장을 보러 나섰다. 마을 입구에서 좌회전을 하면 마트까지 곧장 이어진 큰 도로가 있고, 우회전을 하면 숲길처럼 나무가 우거진 작은 도로가 있다. 급할 것도 없으니, 둘러가는 오른쪽 길을 택하고 제한 속도보다 천천히 달렸다. 마트에 가까워졌을 때 좌회전 신호 대기를 기다리며 멍하게 다른 차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중, 문득 샌프란시스코의 자전거 도로에서 넘어졌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뒤에서 오던 차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 대낮부터 와인 한 잔 마시면서 책을 읽었다. 비는 나무와 잔디의 냄새를 일깨웠고, 그것이 비 냄새와 한데 어우러져 창문을 타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중, 문득 치앙마이의 어느 골목길에서 코코넛 풀빵 나누어 먹으며 옆동네까지 산책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옆동네에서 발견한 까오쏘이 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얼굴이 푸석한 것 같아서 자기 전에 마스크팩을 하기로 했다. 바르면 얼굴에 열기가 느껴지면서 모공이 열리고 쫀쫀하게 스며든다는 꿀팩을 올려놓고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미온수로 씻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것이 피부인지 기분인지 모르겠지만, 영양 크림 듬뿍 바르고 잘 준비를 했다. 침대의 이불 한 귀퉁이를 들어 올리고 그 속으로 파고들면서 문득, 베트남 다낭의 리조트 사우나 자쿠지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 엄마가 참 좋아했었는데.
지금 나는 여기에 살고 있는데, 불쑥불쑥 그때의 여행들이 말을 걸어온다. 맥락도 논리도 없이 어느 날 문득, 아주 구체적인 장면과 그 느낌과 공기와 냄새까지 한꺼번에 확 들이닥친다. 대체로 그때 그 순간에는 이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불쑥 떠오르리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런 흔한 장면들이 선택되어 선물 상자가 배달되듯 툭, 하고 던져진다. 마치 1초짜리 타임머신 여행을 한 것처럼.
무심결에 지나쳤던 장면이 떠올라 그때의 내 시선과 마음을 이해해보기도 하고, 아주 사소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를 반성하기도 하면서, 나는 종종 그때의 여행들과 대화를 나눈다.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해서 그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미련이 남은 여행자의 허세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더 많은 여행과 그로 인한 타임머신 여행을 경험하다 보니 이제는 그 말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그때의 여행이 슬그머니 건네는 질문과, 응원과, 격려와, 온기가 지금의 나를 또 조금 성장시킨다. 그래서 그 여행들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