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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Aug 17. 2020

돈은 다음에 주세요

태국 빠이


우리는 가벼운 라거 맥주 한 캔씩 손에 들고 토요일 오후의 산들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매번 어떻게 대화가 시작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 그와 나는 그동안 우리가 함께했던 여행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서 떠오르는 장면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마치 그 모든 기억들을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아서, 빠뜨린 것 없지? 싶은 마음으로 차례차례 하나씩 점검하는 사람들처럼. 


"지금 막 어떤 비어가든이 떠올랐는데, 거기가 어디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빈백 bean bag 게임했던 곳인데, 기억나?"


"아, 거기 기억나. 트래킹 갔다가 트래버스 시티 Traverse City로 돌아오는 길에 들렸잖아. 근데, 왜?"


"아아, 맞아. 그냥, 지금 딱 그런 비어가든에 앉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이렇게 뜬금없이 떠오르는 장면으로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지난 여행들이 남겨놓은 찰나의 환기가 그에게도 종종 찾아오는가 보다. 단편적인, 그러나 그 나름의 강렬함이 있는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공유하다 보면, 하릴없는 토요일 오후의 산들바람에 마시는 싸구려 맥주 한 잔이 세상 달콤하게 느껴지곤 한다.


말이 나온 김에, 우리는 여행 연대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재미날 것 같은 프로젝트 아이디어에 신이 나서, 일단 맥주부터 사 오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류 전문 상점으로 향했다. 대형 마트에 비교하면 많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는 커다란 창고에 얼음처럼 차갑게 맥주를 보관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며 급하게 맥주가 필요할 때 찾는 곳이다. 그는 그의 맥주를 고르고, 나는 나의 맥주를 골라 계산대 앞에 섰다.


이름은 모르지만, 서로 얼굴은 알아보고 가벼운 안부를 묻곤 하는 남자 직원이 우리를 반겼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하고, 그와는 가끔 농담도 주고받는 중년의 남자분이다. 카드 결제를 하려는데, 무언가 기계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이래저래 두드려보던 직원은 아무래도 당장 고쳐질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카드를 돌려주면서, 우리에게 그냥 가라고 말했다.


"다음에 오면 주세요."






그때 나는 태국 빠이에 있었다. 


지내던 리조트에서 공짜로 빌려 준 자전거는 좋게 말하면 빈티지 감성 넘치는, 객관적으로 말하면 낡아 빠진 시골 할아버지 자전거였다. 아무 골목에나 아무렇게나 세워 두어도 아무도 탐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자전거를 타고 아침 꽃 시장이 열리는 공터를 둘러본 뒤, 이리저리 눈에 띄는 대로 돌아다니며 작은 마을의 길들이 어떻게 만나고 이어지는지 익히고 있었다. 자전거는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는 섬세하게, 두 발로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넓게, 낯선 동네와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 어느 좁은 골목길을 거쳐 큰길로 나가려다가, 나는 묘한 분위기의 카페를 발견하고 자전거를 세웠다.


절묘하게 모든 경계가 무너져 있는 곳이었다. 이렇다 할 입구가 없었고, 실내와 실외 공간이 이어진 듯 분리된 듯했고, 곳곳에 여전히 작업 중인 듯한 작품들과 그에 필요한 도구들이 놓여있는 동시에, 완성된 작품들이 가격표를 달고 전시되어 있었으며,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싱그러운 초록 화분들 사이에 슬그머니 놓여 있기도 했고, 음료를 만들어 내는 작은 주방 공간은 주인의 개인 작업 책상과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묘하게 무너진 경계는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안에 슬그머니 머무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한참 동안 구석구석을 구경하다가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서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을 읽었다. 나에게 아이스티를 내어준  주인은 내가 오기 전부터 하고 있던 페인팅 작업으로 돌아갔다.


나무 그늘에서 차분한 공기와 바람을 느끼며 뜨거운 햇살이 내려앉은 골목을 내다보는 일은 좀처럼 지루해지지 않았다. 어느샌가 주인이 물에 적신 수건 한 장을 가져다 내 자전거의 검은색 안장 위에 얹어둔 것이 보였다. 여름 햇볕에 안장이 익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요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오후 내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요가원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와야지,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좋네요, 여기. 저녁에 다시 올까 하는데, 몇 시까지 하세요?" 하고 작업 중이던 주인에게 말을 붙이며, 음료와 미리 골라둔 엽서 몇 장의 가격을 물었다. 그때, 그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었다. 


"저녁에 오시면 그때 주세요."






아무리 여러 번을 들락대며 친숙해진 도시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여행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라도,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니면 "이방인"이라는 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길어야 몇 주 정도를 보내는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더더욱,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도드라지는 "낯선" 사람이 되기에, 생각도 행동도 조심스러워진다.


영국 남부, 작은 마을들을 잇는 버스 안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존재했던 적이 있다. 버스를 가득 메운 파란 눈동자들은 내가 느낄 부담감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할 만큼, 동양인을 마주할 일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파란 눈을 마주하는 경험이 많지 않았던 때라,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괜찮을 거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다독였더랬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낯설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섬세해지는 만큼 그 반대의 시선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여행지를 얼마나 좋아하게 되는지와 관계없이,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을 여행자로서 구경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여행자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세상을 잃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다 처음으로, 태국의 작은 산골 마을 빠이에서, 영어 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던 주인아저씨로부터 "돈은 저녁에 오시면 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낯선" 사람이 아닌, "저녁에 또 온다고 한 어떤"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놀랐고, 울컥했었다. 혹시나 일이 생겨 못 올지도 모르니 지금 계산하고 가겠다는 것을 주인아저씨는 끝내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난 그날 저녁에 다시 꼭,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만났을 때 아저씨에게 굳이 돈을 안 받을 건 뭐냐고 물었는데, 아저씨는 내가 "또 올게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다시 올 것 같아 보였다고 했다. 또 울컥, 기분이 좋았다. 낯선 이를 향한 경계가 아닌, 어떤 이를 향한 믿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빠이의 매력적인 카페와 그 주인아저씨를 떠올리며 순간적으로 추억을 소환하는 사이, 카드를 되돌려 받은 그는 당황했고 말을 자꾸 버벅거렸다. 중년의 직원은 맑은 눈빛으로 재차 괜찮다고 오늘은 그냥 가시고 다음에 오시면 주세요,라고 말했다, 영수증도 뭐도 없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한 그는 한 박자 늦게, 예전에 내가 빠이에서 느꼈던 "나를 향한 믿음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감동에 젖었다. 


"그렇게 우리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셔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와 봄날처럼 따뜻한 마음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만큼은 타국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방인 기분이 들지 않아 더 즐거웠다. 우리는 다시, 토요일 오후의 산들바람을 즐기며 여행 연대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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