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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woHearted Jan 07. 2021

반숙 계란을 먹던 아저씨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비엔나에서 짤츠부르크까지 가는 길은 단순했다. 하염없이 서쪽으로, A1이라는 고속도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무슨 용기로 차를 렌트해서 돌아다닐 계획을 했던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철없고 무모하게 씩씩했던 젊은 내가 낯설고 부럽다.


내비게이션 기기 추가 요금이 렌트 기본요금보다 더 비쌌고, 기가 막히게 비싼 독일 중대형 세단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차량이 수동 옵션이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 빌릴 수 있는 차는 쳐다보기도 민망한 시티 카, 스마트뿐이었다. 프랑스 파리 같은 복잡한 시내에서 주차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조그마한 자동차. 그러나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스마트에는 세미 오토 기능이 있어서 수동 자동차 운전이 두려운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 지인에게 부탁해서 미리 연습 운전도 해두었다.


렌터카를 픽업하러 비엔나의 힐튼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간밤에 구글 지도를 펼쳐 놓고 비엔나에서 짤츠부르크의 숙소까지 가는 길을 예습하고 중요한 출구 번호 같은 것들을 메모해 두었지만, 내비게이션도 없고 와이파이도 없는 고속도로 운전을 앞두고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 떨렸다. 화장실에서 한참 동안 심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렌터카 픽업 데스크를 찾아갔다. "스마트 예약했어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렌터카 직원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굉장한 특별 대우를 해준다는 말투와 표정으로 "스마트보다 훨씬 크고 성능 좋은 독일차로 무료 업그레이드해줄게!"라고 말했고,  차가 수동 옵션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안돼~" 하고 뭉크의 절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직원은 급히 근처의 다른 지점에 연락해서 스마트를 구해주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나는 어떻게 1 보통 면허를 땄을까, 이럴  혼자서도 근사하게  차를 운전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 아쉬웠.


그래도 유럽에서 스마트는 흔한 자동차니까 부끄러워하지는 말자, 싶었지비엔나에서 짤츠부르크까지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유일한 스마트 운전자였다. 온갖 독일차들이 그야말로 -하고 곁을 지나갔지만, 꼬마자동차 붕붕이 같은 스마트는 시속 110km 이상 밟는 것을 힘들어했다. 90에서 100 정도로 천천히(?), 지역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아는 노래는 따라 부르기도 하면서 달렸다. 유난히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많은 날이어서 구름의 모양에 따라 고래밥, 강아지, 죠스라고 이름도 붙여가면서.






굳이 자동차를 렌트하고 싶었던 이유는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하는, 짤츠부르크를 포함한 짤츠감머굿 지역을 둘러보기에 기차보다  편할  같아서였다. 이미 동화 같은 마을로 유명했던 할슈타트까지 가는 길에 크고 작은 호수도 많고 호수 주변으로 마을도 많은데, 지도만 들여다보아서는 어떤 마을을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기차 시간표에 맞추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움직임과 멈춤에 자유를 주고 싶었다실제로, 짤츠부르크에서 할슈타트까지 가는 길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시선을 빼앗길 때마다 쉬어가다가는 오늘 안에 도착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운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할슈타트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시간 직전의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큰길을 따라 언덕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대부분이 B&B 운영될 테고, 여기저기에서 Frei (빈방 있음) 깃발을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숙소 예약을 미리 해두지 않았다. 며칠이나 머무르고 싶을지 미리 점칠 수 없기도 했고.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서일까, 기대만큼 많은 환영의 깃발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급한 마음에, 큰길을 따라 호수 쪽으로 야외 테라스 식당을 갖춘 노란색 B&B 건물로 들어갔다. 다행히 마지막 하나 남은 방이 있어, 일단 이틀 동안 머무르기로 했다. 천천히 둘러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선택하려 했던 원래의 계획과는 반대로, 일단  방이 있는 노란 집에 짐을 풀고   마을 산책을 나서게 되었다. 마을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호수가 발산하는 기운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는데, 그것은 나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강력한 자연의 느낌아니었다. 호흡을  때마다 나의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어와 천천히 나와  공간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그런 편안한 기분을 주는 기운이었다.






방의 창문을 열고, 창틀에 걸터앉아 오스트리아 맥주를 마셨다.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에, 짤츠부르크에서 시티패스로 공장 견학도 하고 시음도 했던 브루어리의 캔맥주가 눈에 띄어  개를 샀더랬다. 창문 너머, 호숫가에 차려진 B&B 야외 테라스에는 나무마다 은은한 전구와 등이 장식되어 있어 포근한 분위기였고, 테이블마다 오스트리아 국기를 연상케 하는 빨강 하양 격자무늬의 테이블보가 씌워져 있었다. 저녁 시간에는 라이브 연주 소리도 들려왔다.


창가 자리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아침에서 오후로, 다시 밤으로 태양의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창밖의 호수 풍경도 달라졌다. 창틀 바깥쪽으로 예쁜  화분들이 걸려 있어서, 꽃과 함께 호수가 보이는 것도 좋았다. 알람이 없어도, 눈부신 햇살이 간지러워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기분 좋은 아침,  창틀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아참, 여긴 B&B니까 아침 식사도 포함이지! 싶어서 식사 공간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는 객실 번호가 미리 올려져 있었다. 일행의 인원수에 맞추어 미리 테이블 세팅이 되어 있었다. 빨간색 테이블보, 하얀색 기다란 양초, 빨간색 장미꽃, 그리고 은색 식기와 하얀 도자기 식기들. 세련되고 우아한 느낌은 없지만, 오랜 시간을 지켜온 고상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고맙게도, 놀랍게도, 혼자인 나를 위한 자리는 조그마한 2인용 테이블이 아닌,  옆의 4인용 테이블이었다. 덕분에 괜히 쓸쓸한 기분도, 겉도는 기분도 느낄 필요 없이, 느긋하게 아침 식사 시간을 보낼  있었다. 반대편  쪽에 앉은 사람의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식당에서,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를 배려했다. 여기저기에서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아서 커피를  잔쯤 마시 방에서 읽던 책을 조금  읽었다.


한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대각선으로 반대방향에 위치한 테이블에는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두 커플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아저씨가 앞치마를 두른 직원으로부터 삶은 계란을 받아 든 참이었다. 소주컵처럼 조그만 하얀 도자기 컵에 계란이 껍질째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에그 컵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유럽으로 여행을 다닐 때마다 조식당에서 볼 수 있기도 했고, 한국의 호텔에서도 내어놓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아저씨가 삶은 계란을 대하는 태도였다.


직원이 "몇 개 드릴까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계란 하나와 커피면 돼요."라고. 그리고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소금을 살짝 뿌린 뒤 조그만 스푼으로 떠올려 한 입, 그 맛을 음미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치 밥 한 그릇을 비워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그의 고상한 손동작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테이블 앞을 지나던 직원 아주머니가 말을 건네어왔다, "먹어볼래요?" 반가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조그마한 에그 컵을  앞에 놓아주었다 입에 홀랑 넣는다고 하더라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을 반숙 계란 하나를, 나도 흉내 내어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먹어보았다. 솔솔 뿌린 소금이 노른자에 녹아내려 이렇게  맛이 나는구나, 생각했다. 천천히 조금씩  맛을 음미하면서 먹으면, 반숙 계란도 고급진 요리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생각했다.


조그마한 마을에서 별다르게 하는 일 없이 3일을 보내고 나면, 대충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길가의 집들이 익숙해진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숙박을 더 연장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했다. 할슈타트로 오는 길에 숨이 막히도록 멋진 호수를 보았기에, 그곳으로 가보고 싶다고. 나중에 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샤프베르크가 있는 울프강 호수였다. 유명한 장소들은, 그곳을 모른 채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도 그 매력이 돋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해지는 거겠지만.


3 동안 주차장에서 쉬고 있던 스마트에 시동을 걸었다. 울프강 호수는 어떤 기운으로 나를 맞이해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할슈타트를 빠져나왔다. 기차 시간표에 쫓기지는 않았지만, 직접 운전을 하면서 다녀도, 머물던 마을을 떠나는 것은 아쉬웠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 중에 조그마한 상자가 하나 있었다. 크리스마스 한참 전부터 트리 아래에 놓여있던 그 작은 상자를 볼 때마다 나는, 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갖고 싶어 하던 손목시계가 들어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더랬다. 상자를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는 에그 스탠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계는 잊어버렸고, 스르륵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비로소, 에그 스탠드를 가지게 되었다. 여행지에서나 쇼핑몰에서나  번이나 망설이곤 했지만 끝내  손으로 사게 되지는 않았던. 왠지 집에 가져다 놓으면 그저 장식용으로, 혹은 예쁜 쓰레기로 취급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우려도 있었던 에그 스탠드. 그래서일까, 이렇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근사한 핑계와 함께 갖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계란을 하나 꺼내어 삶았다. 어제 새로 사 온 싱싱한 계란이라서일까, 작은 절구에 넣고 손으로 갈아낸 핑크 소금을 곁들여서일까. 소금이 노른자에 녹아내려 달콤함이 느껴졌다. 소금을 솔솔 뿌리고, 작은 스푼으로 한 입을 떠먹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고소함을 음미했다. 할슈타트의 아저씨가 떠올랐다.


반숙 계란 하나를 천천히 먹는 동안, 나는 꼬마 자동차 스마트로 비엔나에서 짤츠부르크까지, 다시 할슈타트까지 달려가 노란색 B&B의 아침 식당에 들어서는 장면을 회상한다. 반숙 계란 하나를 천천히 먹는 동안, 오래된 내 젊은 날의 여행이 내 기억 속에서 아직 빛바래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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