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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Jun 28. 2023

여름의 비, 언젠가 그칠 거라는 말

- 고요하면서도 착실히 반짝이는 생활일기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그대로 맞으며, 그가 손을 머리 위로 힘차게 흔들며 나에게 걸어왔다. 마음만으로 응원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여러 번 전했는데도 그저 직접 와서 보고 싶다고 허허 웃어버리는데,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그날 우린 보리밥에 나물을 넣어 한 그릇 싹싹 비벼 먹고, 나의 작고 소중한 전시를 함께 보며 쑥스러움과 뿌듯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미묘한 감정을 공유하고, 바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조금 더 먼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못 본 사이 쌓인 일상의 즐거움과 힘듦을 이야기하고 지금 좋아하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을 힘주어 말하며 주체적으로 사는 삶을 생각했다. 


 혼자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들을 그에게 풀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 얼굴이 풀어지고 그의 얼굴도 나와 비슷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그동안 감춰왔던 아픔을 아주 살짝 끄집어내서 그에게 보였다. 그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었고 잔잔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빛은 그가 나에게 예전에 전했던 편지를 기억나게 했다. 

이제 가벼워진 몸으로
아직 탐험하지 않은 세상을
더 멀리 걸어가고 더 많이 사진처럼 눈에 담아주시길.
그리고 글과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시길.     
- 당신의 오랜 팬, OO가


 나의 결심을 따뜻하게 응원해 줬던 그의 다정함이, 이번에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오니 일기예보에서 말했던 비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고, 김지혜 작가의 책 '책들의 부엌'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여름 장맛비는 영원할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이 비도 언젠가 그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한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오늘도 한 발자국 가까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구의 어떤 밤을 버티면서만 살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밤의 축제를 껴안고 춤추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유진은 생각했다. 태풍은 결국 힘을 쓰지 못한 밤이었다.

- 김지혜, 책들의 부엌 (2022, 팩토리나인, p.161)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넣어둔 아픔과 슬픔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이 차츰 내 안으로 녹아들어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가끔 유독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아주 살짝 꺼내보여도 괜찮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웃고, 좋아하는 무언가로 하루를 채우면서 보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괜찮다면, 다음엔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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