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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소이 Jul 05. 2023

호주 멜버른의 창문

- Through someone's window

 2023.06 


시간여행자에 대한 기억

 밥을 먹고 밀려오는 포만감에 살짝 나른해져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공중전화박스 같이 생긴 타임머신을 타고 우주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드라마에 한동안 시선이 멈추곤 했다. '닥터 후'라고 불리는 시간여행자가 보여주는 세계는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에 함께 존재하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어렸던 나는 그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섞이고 변주되는 세계들을 흥미롭게 눈에 담으며 매일 꿈속에서 자유로운 시간여행을 했던 것 같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이동이 제한되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나라를 이전보다 면밀히 관찰하고 애정하게 되었다. 대도시, 외국 여행에 대한 글을 보며 동경했던 마음이 헐거워지고,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동네 상점과 카페, 공원을 더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와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이 다시 생겼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공간을 벗어나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의 창문 밖 풍경을 공유하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Open a new window somewhere in the world 


 사이트에 접속해서 누군가의 창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멜버른의 붉은 노을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호주 멜버른의 붉은 하늘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과,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노을 물결이 넘실대는 너른 하늘에 위안을 받는다. 창문가에 초록초록한 식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귀엽다. 창문 너머 보이는 이웃집 지붕들은 아담하게 정돈되어 있고 고요하다. 


 이 창문의 주인은 지금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창문 근처에 걸터앉아 있지 않을까. 저무는 해로 물들어진 하늘을 보며 오늘 하루도 수고한 자신을 다독이고 있을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잠시 멈춰있는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오묘한 안정감을 준다. 


 멜버른의 노을을 보다가 내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프로젝트 마감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고 해내야 한다는 처절함에 사로잡힌 채 터덜터덜 걷던 퇴근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바라봤던 그날의 하늘, 간밤에 그친 비바람이 남기고 간 거대한 구름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자색, 진홍색, 적색, 황색, 남색이 섞여서 바라보는 내내 황홀했다. 그때 멍하니 바라봤던 서울 하늘과 지금 바라보고 있는 멜버른의 하늘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여기 혼자 있더라도 이 순간 수많은 곳에 있는 누군가들이 함께 존재하고 함께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시선들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마주치며 서로에게 함께하고 있는 듯한 위안을 주는 것 같다고. 멜버른의 노을을 보다가 잠시 시간여행자가 되어 이국과 과거를 넘나들며, 창문을 공유해 준 그와 과거의 나를 토닥여준 기분이 들었다.



(사진 출처 : WindowSw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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