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여정
그는 내게 서슴없이 말했다. 우린 어느 지자체 지원사업에서 처음 만났다. 가까운 자리에 앉아 여러 번 얘기하다 보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세 가까워졌고, 사업이 끝나고 뒤풀이로 몇 번 만나서 밥을 먹기도 했다. 먼저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내 성격상, 그가 먼저 말을 걸고 아는 척한 덕분에 관계가 이어진 게 거의 확실하다. 그가 주도한 몇 번의 뒤풀이 후에 받은 협업 제안을, 난 선뜻 하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림을 전공하고 전시회 경력도 화려한 그에 비해 난 내세울 게 없었다. 괜히 폐만 되는 건 아닌지 주춤하는 내게,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단 해보자며 설득했다.
그는 경기도에서 후원하는 모든예술31 사업을 지원하자고 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예술가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여러 예술 영역이 융화되도록 기획하고 직접 진행하는 사업이었다. 둘 다 지금까지 홀로 작업을 해왔고, 다른 분야의 작가와 함께 작업해서 작품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혼자 작업을 하면 스스로 정한 일정에 맞춰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진행하면 되니까 마음이 더 편하다. 누군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생길 수 있는 일들이,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때 감당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누고 맞춰나가며 작업하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각자의 세상이 만나고 서로의 세상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새로운 시도는 낯설고 긴장되지만,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로 인도하는 소중한 기회로 느껴져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를 믿기로 했다. 한 번만 더, 도전해보고 싶었다.
기획 의도와 사업 세부내용, 성과, 예산계획을 찬찬히 써 내려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보여줄지 막연했던 구상이 점점 명료하게 잡혀갔다. 그는 그림을, 나는 수필을 쓰는 작가로, 회화와 수필을 조화롭게 선보일 수 있는 방식을 거듭 고민하며 의견을 모았다. 전시장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어떤 성과물을 낼 것인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번 수정하고 다듬어서 최종본을 완성할 때까지 며칠이 걸렸다. 서류를 제출하고,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
면접대상자 발표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재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면접대상자 명단에서 우리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수없이 서류에서 탈락했던 지난날이 떠오르면서, 면접을 볼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면접 당일, 긴장해서 잠을 설치며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대기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으나,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잘 할 수 있을까, 잘 하고 싶다. 의문과 의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손에서 베어져 나오는 땀을 닦으면서 팀으로 지원한 게 이렇게나 좋은 것인지 새삼 느꼈다. 발표할 때마다 떨리는 나 대신 자신감 넘치는 그가 PT 발표를 맡고, 발표가 끝난 후 심사위원들의 질문은 둘이 함께 받았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리면서 내게 온 질문도 곧잘 대답할 수 있었다.
면접이 끝나고 그와 근처 카페에서 소소한 뒤풀이를 했다. 홀가분해진 얼굴로 면접에서 받은 질문과 대답을 복기해보니, 우리의 프로젝트를 생각했던 대로 잘 대답한 것 같았다. 만약 이 사업이 선정되면 한 번만 더 해보라고 기회를 주는 거라 여길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현실이 녹록지 않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시간을 아낌없이 누릴 거라고.
요즘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을 슬며시 꺼냈다.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 시작했지만, 제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매일 걱정하면서 잠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화려해 보였던 그의 삶에도 걱정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겐 커다란 우주 같은 고민을 안고 산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생각에, 항상 밝고 자신감 넘치던 그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 잠깐 앉아서 가려던 게 몇 시간이 흐르고, 이미 바깥은 어둑해졌다. 갈 길이 멀기에 더 늦기 전에 일어나야 했다. 우리 모두 잘 됐음 좋겠다고 손에 힘을 주어 흔들며 헤어졌다.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며칠 후, 우리의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또렷하게 새겨져 반짝였다.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작업하는 것, 다른 영역의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 그와 작업하는 것. 처음이 많아서 우여곡절이 많을 테지만,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은 전보다 강해져서 두렵지 않았다. 느리지만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면서, 올해도 미미하지만 거대한 도약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와 함께 우리의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