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여정
요즘은 TV를 잘 보지 않지만, 예전에는 매주 시간을 정해두고 꼭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었다. 그중에서 진행자가 출연자의 고민을 듣고 그에게 해결책을 내려주면 신통방통하다며 개운한 얼굴이 된 출연자가 함께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며 막을 내리는 프로그램을 가장 좋아했다.
천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가 나와서, 예술대학 입시를 위해 아크로바틱을 배운 이야기를 한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당시 뭐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크로바틱 수업을 들었는데, 이후 몇 년이 지나 배우가 되고 그를 대중에게 알린 천만 관객 영화의 오디션을 볼 때 예전에 배웠던 아크로바틱이 도움이 되었다며, 뭐든지 하면 좋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열중하고 있는 것을 쓸 수 있을지 당장은 알 수 없어도 결국 언젠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알 수 있었다. 뭐든지 도움이 된다는 그의 이야기를, 이제 나의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모든예술31 사업에 합격한 기쁨을 만끽하고 나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교부설명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팀 대표로 참석하기로 하고 기분 좋은 떨림을 한 아름 품고 갔다. 괜스레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재단 담당자가 앞에 나와서 인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얼굴에 웃음기가 있었다. 그런데 사업을 하는 팀이 다 같이 모이기 쉽지 않을 테니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자는 말을 듣자마자, 입술이 미묘하게 일자로 굳어버렸다.
자기소개라니, 설렘이 긴장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발표라는 단어만 들으면 긴장부터 해버리는 난, 언제쯤 떨지 않은 목소리로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앞에 앉은 팀이 차례로 일어나서 노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이어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까지 명쾌하게 끝냈다. 재빨리 머릿속으로 자기소개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내가 일어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은 좋았다. 일어나서 간단히 팀 소개를 하고 프로젝트의 주제와 방식을 말하는데, 머릿속에서 정리했던 말이 엉키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후련하긴 했다. 일단 끝나면 잘했든 못했든 마음은 전보다 편해진다.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시간이 얼마나 쌓여야 내가 만족할 만큼 나아질 수 있을지, 앞으로 마주해야 할 발표의 순간들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그러나 그 순간들로 조금씩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함께 포개어졌다.
이제 긴장감은 사라지고 설명회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로 회계정산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산의 중요성, 서류를 잘 꾸려서 내는 방법 등 행정업무가 많았는데, 내용이 어려워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정산자료를 제출할 때 주로 실수하는 경우를 찬찬히 짚어서 메모해가며 들었다. 사례비 증빙자료를 묶어서 내는 방법, 원천세, 종합소득세 신고, 회사에 다니며 듣던 용어가 마구 튀어나왔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던 건, 회계정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있진 않았지만, 당시 맡았던 업무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어서, 회계 담당자와 알고 지내며 물어보고 어깨너머 알게 된 지식이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다롭고 골치 아프다고 여겼던 과거의 일들이, 그 당시엔 생각하지도 못했을 곳에서 도움이 된다니, 아크로바틱을 배웠다는 배우가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발표는 만족스럽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생각에 처져있던 어깨가 올라갔다. 작업하고 전시를 준비하며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내가 지금까지 보고 배운 모든 경험을 살려서 해보겠다는, 긍정적인 힘이 솟아났다.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되니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앞으로 겪을 다양한 경험이 미래의 내 삶을 좀 더 충만하게 만들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