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난,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읽고 쓰는 걸 좋아했다. 그 나이 때 아이들처럼 놀이터에서 뛰어놀기보다 조용한 곳에 앉아서 관찰하고,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좋아했다. 자연스레 공부하는 아이가 되었고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성적이 좋고 성격이 모나지 않으면 대체로 학급의 장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난 부끄러움을 많이 타긴 했지만 여러 시도를 해보고 싶은 대범한 면이 있어서 학급 반장이나 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후보 연설을 하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 당시엔 공부를 잘하면 반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운이 맞아서 반장을 맡게 되었다.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난, 반장이 되면서 목소리가 통솔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대가 약하고 뱃심이 없었던 내 목소리는 작고 가늘게 떨렸고, 학급의 질서를 지켜내는 게 늘 버거웠다.
언젠가부터 앞에 나서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하는 발표가 다가오면, 온갖 걱정을 하며 전날 밤을 설치곤 했다. 내 인생의 발표는 학교를 졸업하면 끝난 줄 알았지만, 그때까지 겪어왔던 발표보다 훨씬 더 많고 큰 규모의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취업준비를 하며 면접에서 발표는 필수였고, 직장에 들어가면서 더 많은 발표를 해야 했다. 직장에서 연차가 쌓이고 승진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집에 돌아오면 멋지게 발표를 해내는 상상의 나를, 목소리를 쥐어짜며 간신히 발표를 끝낸 현실의 나에 덮어씌우며 위안했다.
나이가 들수록 담대해지고 목소리도 커진다는데, 난 그대로였다. 타고난 성량으로 어떤 발표든 떨지 않고 자신감 있게 해내는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변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다. 나도 목소리가 커지고 싶고 떨지 않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고 싶다고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계속하다 보면 괜찮아질 날이 올 거라고 했다. 그러면 큰 목소리와 담대한 마음을 가진 그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얻곤 했다. 그러나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앞에 나설 순간이 되면 다시 요동치는 심장은, 아직 난 멀었다는 절망을 안겨줬다. 나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일을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자책하는 마음도 줄어들 거란 마음으로 기울어졌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게 맞는 일을 모색하기로 했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 조그마한 목소리를 부끄러워하며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기로.
회사 밖으로 나오고 나서, 세상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발표하지 않아도 돈을 벌 방법은 많았다. 내게 적합한 밥벌이를 찾기 위해 하나씩 조사해가며 소심한 마음과 염소 목소리로도 사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줬다. 난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담아서.
결혼식을 하기로 한 레스토랑에서 소개해준 업체에 식 진행과 관련한 상담을 받은 날, 우린 식을 직접 진행하기로 했다. 그는 사회 없이 우리가 해보는 게 어떻냐고 조심스레 물으며,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걸 꺼리는 나를 염려했다. 겨우 발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회를 맡아야 한다니.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는 대부분은 자신이 말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소심한 내가 싫었다. 나도 많은 사람 앞에서 떨지 않고 멋지고 매력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매번 이런 순간이 오면 고민하고 걱정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나를 부끄러워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우릴 사랑하는 사람들 앞이니까. 우리가 실수하고 부족해 보여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가 한 말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옆에 있고, 우리가 함께하는 거니까 괜찮다며,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함께’라는 말.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일을 함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약간의 용기가 생겼다. 혼자 해내기 힘들지라도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떨리는 마음을 조금씩 붙잡아주었다. 평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는지도 모른다. 결국, 언젠가 한 번은 나서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은 내가 반드시 나설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도망친다면,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내게 손을 내밀고 함께 사회를 보자고 한 일이, 내가 그동안 피하고 싶었던 발표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고 믿으면 괜찮아지는 마음으로, 난 지금껏 줄여왔던 기회를 다시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남아있었지만, 우리가 직접, 함께 만든다는 뿌듯함이 더 컸기에 용기를 내서 해보기로 했다. 이젠 피하지 말고 마주하자. 자그맣고 떨리는 목소리일지라도 그와 함께하는 삶에서 나서야 하는 순간엔 숨지 않고 마주하며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사회를 보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내가 조금 변한 걸까, 우리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가 되자 내 안에 숨어있던 목소리가 드러나며 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