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곳에서 붙박이장처럼 살았다. 아빠 일 때문에 태어난 곳에서 지역을 옮겨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한 도시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이 도시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며 한 집에서만 거의 이십여 년을 살았는데, 그곳에서 함께 나이를 먹은 살림살이가 우리와 함께 이동하며 색이 변하고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린다. 다음 집으로 이사 갈 때 전부 바꿔버리겠다는 엄마의 한숨 소리에는 진득한 정이 묻어나와서 그것들이 우리와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생각하며, 엄마의 구매 예정 목록에 있다는 냉장고와 그의 친구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주방 한쪽에 서 있는 냉장고는 하얗게 반짝이던 프레임이 세월을 담고 노랗게 변했다. 한때 최첨단 기술이라며, 물이 나오는 냉장고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냉장고 문을 여는 쪽에 정수기처럼 생긴 부분이 있어서, 자동차 페달같이 생긴 부분에 컵을 대고 뒤로 밀면 냉장고 정수 통에 담긴 물이 나왔다. 신기해하며 좋아했던 건 잠시, 정수 통에 물을 계속 채우는 게 귀찮아졌고, 주전자에 물을 잔뜩 채우고 보리차를 넣어 끓여 먹는 생활로 돌아갔다. 냉장고에 달린 정수기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정수 물을 채웠으니 정수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업체에서 자랑하는 최첨단 기술은 그 기술을 적절히 사용해서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한테만 유용하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답답한 면이 있지만, 난 손이 더 가더라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그 방식에 좀 더 마음이 갔다. 정수 역할은 무용지물이었지만, 우리가 먹을 식재료를 상하지 않게 보관해주는 기능은 여전히 잘 해내며 우뚝 서있다.
청첩장 모임을 하면서 빠트리지 않고 물었던 건 가전과 가구의 구매 방법이었다. 어떤 브랜드의 가전을, 어떻게 해야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 보면 볼수록 눈이 높아지는 유혹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고 싶었다. 가전은 무조건 무엇이라며 선호하는 브랜드를 외치는 쪽과 할인을 많이 해주는 브랜드의 신제품을 통으로 구매하는 게 이득이라는 쪽, 필요할 때마다 할인을 많이 하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서 지난 시즌의 제품을 사면 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고 세탁기에 빨래를 넣어 돌리고 가끔 심심할 때 티브이를 틀어서 흥미 있는 채널을 돌려보고 더우면 에어컨을 틀었던,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일상이, 이제는 내가 전부 갖추고 만들어야 누릴 수 있는 삶으로 변했다.
가전이나 가구는 한 번 사면 몇십 년을 쓸 수 있으니까, 처음에 살 때 잘 사야 한다는 말을 수십 번은 더 들은 것 같다. 가성비를 우선으로 생각하다가 고민에 빠졌다. 내게 가성비가 있다는 건, 가격이 높지 않고 성능이 매우 좋은 건 아니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것이었다. 튼튼하고 잔 고장이 없는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는 건 동의한다. 나도 부모님 못지않게 물건을 오래 쓰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휴대전화는 4년 이상 쓰는 게 기본이고, 15년 된 볼캡과 10년 된 단화를 지금도 애지중지하며 쓰고 있다. 그러나 가전은 가격대가 높고 기능도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고난도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당장 2, 3년 후에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몇십 년이라니,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미래의 일상에 몇십 년 전 산 냉장고와 함께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후기를 보면, 요즘 가전은 인공지능이 탑재되고 스마트하다는 여러 기능이 붙어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제품을 사용할 내가 스마트한 사람이 아니었기에(주전자에 물을 끓여 먹는 사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무엇을 우선으로 두고 사야할지 가격, 성능, 내구성, 필요성, 사용하는 나의 성향과 능력까지 고민해야할 것이 수십가지는 되는 것 같았다.
친구의 소개를 받고 알아보니, 가전 전체를 구매하고 싶을 때 신혼이라는 단어는 마법처럼 각종 혜택을 받게 하고 개별로 구매했을 때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단, 그들이 소개한 품목의 최신 제품을 전부 구매했을 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했다. 가장 간단하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의 기준으로 필요성을 중심으로 잡고, 그와 마주 앉아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우리 집에 식기세척기가 필요한가,
주방이 작아서 넣을 공간도 안 나와. 제외.
에어드레서 있어야 하나,
양복 어쩌다 한 번 입어. 제외.
오븐이 필요한가,
에어프라이기 사면 되잖아. 제외.
밥솥은 어때,
밥솥은 땡땡이지 여기는 아니야. 제외.
제습기도 있어,
살다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사면 돼. 제외.
최신 제품을 사고 싶은가,
그 많은 기능을 다 쓰지도 못해.
목록에 있는 품목을 하나씩 지우니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결론은, 우린 이 모든 게 필요하지 않았다. 손품, 발품을 팔아서 할인하는 지난 시즌의 제품을 하나씩 사들이는 방법을 택했다.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성비’는 가격과 성능만 고려했다면, 이제 범위를 확장해서 내게 지금 필요한지 유용하게 쓸 사정이 되는지까지 생각하며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되었다. 주변에서 의견을 들어보고 어느 제품이 좋은지 확인하고 참고는 하되,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었다.
돈과 시간이 넘쳐 흘렀다면 큰 고민 없이 최신 제품으로 전체 가전을 다 사버리고,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서 이것저것 사들였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때마다 바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한정된 돈과 시간 안에서 살림살이를 꾸려야 한다. 신혼이니까 전부 새것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갖추고 싶은 마음이 한켠에 살그머니 앉아있었지만, 현재의 내 상황을 직시했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 무리하면 탈이 나고 분명 후회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최대한 나다운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우선순위를 세우는 게 가전을 살 때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함께하는 삶을 꾸려나가며 우선 해야 할 것과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이 계속 생기고, 그때마다 우리만의 기준을 세워서 결정해야 한다.
둘이 머리를 맞대서 우리가 생각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 나갈 거라 믿으며, 결혼식도 주례와 사회 없이 직접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무대 울렁증에 염소 목소리를 가진 내가 생애 처음으로 사회자로 데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