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페 넣은 비건 김밥
비건이나 베지테리언은 아니지만 채소를 즐긴다. 아삭아삭 거리는 느낌이 좋고 맛이 다양하며, 무엇보다 먹고 나면 속이 편하고 가볍다. 내 몸에 집중할수록 채소와 과일이 주는 건강함에 빠져든다. 아, 그렇다고 고기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기, 많이 좋아합니다.(강조)
그날은 푸릇하고 건강한 밥상이 고팠다. 많은 디저트들을 맛보고 느끼는 1박 2일의 서울 출장. 간만의 서울 공기는 참으로 좋았다만 이틀간 먹어도 너무 먹었다. 배 속엔 열 가지도 더 넘는 빵과 과자가 넘실거렸다. 아직 먹을 길이 구만 린데... 프레쉬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당겼다. 야채가 고팠다.
비건 식당을 가보기로 했다. 마침 동행한 박 선생님도 채소를 좋아하셨다. 좋은 기회였다. 야채를 먹으러 가자! 발걸음도 가볍게 비건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아, 이렇게 환영받는 발걸음이라니. 신기해라. '샐러드 먹으러 갈래'라고 물으면 '다이어트하니?', '맛있는 음식이 이리도 많은데 굳이 야채를?'이란 눈빛으로 경계하듯 나를 보던 지난날의 시선이 조금 스쳐 지나갔다. 후훗. 드디어 가보는구나 비건 식당.
내어주신 메뉴판엔 생각보다 많은 요리들이 있었다. 파스타나 리소토도 있었고 햄버거도 있었다. '템페 김밥'은 거기서 처음 보았다. sns에 종종 봤던 '템페'라는 것을 여기서 만났다. 생소해 물어보니 인도네시아의 발효음식이라고 했다. 콩으로 만들어 담백하단다. 으음... 맛있겠지? 선생님과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하다 참나물 파스타와 템페 김밥을 시켰다. 거대한 템페롤이 왔다. 야채가 가득한 커다란 야채김밥 같았다. 한 입에 넣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 김밥을 입에 가득 넣었다. 씹을수록 고소함이 올라왔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여러 야채들과 어우러져 먹을수록 맛있었다. 이야 이거 괜찮은데? 맛있다. 또 먹고 싶어질 것 같아. 생각은 확신이 되었고 나는 일정을 비집고 비집어 채소샵에 들렀다. 로컬푸드들이 가득한 멋있는 곳이었다. 비건 머핀과 비건 그래놀라도 있었다. 물론 템페도. 손에 주렁주렁 템페와 비건베이커리를 들고 바쁘게 기차에 올랐다. 든든했다.
비건 식당에서 처음 만나 그럴까. 나에게 템페란 건강한 식단의 표본이다. 바쁜 아침, 템페를 굽고 있노라면 긴 시간을 소요하는 것이 아님에도 스스로가 뿌듯했다. 잘 생겨먹고 사는구나. 바빠도 스스로를 잘 돌보는구나,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그래서 마지막 템페는 조금 더 잘 먹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나 남은 템페는 더 맛있게, 그날처럼 김밥을 말아먹기로 했다. 김을 깔고 참기름 두른 고소한 밥을 올려 펼친다. 갖은 야채들을 구운 템페와 함께 넣고 말아 준다. 야채가 많이 들어가면 김밥은 커지는구나. 의도치 않았는데 크기까지 그날의 김밥을 닮았다. 큼지막해 한 입에 다 들어가지 않던, 아삭하고 고소했던 그날의 김밥. 와사비가 들어간 간장소스를 만들어 김밥에 찍어 먹었다. 아 역시 꿀맛.
김밥을 준비하고 먹는 내내 그날이 떠올랐다. 선생님과 나눴던 소소한 이야기들, 함께 거닐었던 연남동. 좋았던 날씨와 신기했던 채소샵. 그리고 함께 먹었던 디저트들까지. 신기하게도 음식은 그런 힘이 있다. 평소엔 생각도 안 나던 그날이 김밥을 만들고 먹는 내내 조금씩 선명해지더니, 결국 그때의 공기까지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처럼. 음식은 순식간에 그날 그 시간, 그곳으로 데려간다. 밖에서 먹는 컵라면은 어릴 적 식구들과 함께 간 바닷가를 추억하게 하고, 늦은 시각 만두를 먹노라면 부모님 깨실까 노심초사- 숨죽여 낄낄대며 구워 먹었던 우리 삼 남매의 군만두가 생각난다.
음식은 힘이 세다. 우리를 단숨에 과거로 보내고 추억하게 한다. 10년이고 20년이고 거뜬하다. 혀로 기억하는 시간은 수명이 길다. 그러니 우리는 많이 먹어둬야 한다. 맛있게 먹은 음식은 한 번쯤 만들어도 보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라도 가끔은 용기를 내봐야 한다. 삶 곳곳에 식탁 곳곳에 추억 스위치를 만들어 둬야 한다. 먹는다는 건 어쩌면 보고 듣는 것보다 더 강렬할지 모른다. 그러니 밥 먹자는 약속은 미루지 말자. 조금 귀찮더라도, 나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한 끼 나누자. 후에 그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과 함께했던 그날이 떠오르도록. 예뻤던 그 시간이 잊히지 않도록.
박 선생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려야겠다. 내가 만든 김밥을 보여드리며 김밥을 핑계로, 맛있는 밥 한 끼 새로 이어야겠다.
슬기의 템페's tip.
넓적하게 생긴 템페는 적당한 사이즈로 잘라 구우면 뚝딱 요리가 된다. 가지나 감자, 브로콜리 등을 강불에 살짝 볶고 템페도 노릇노릇 굽는다. 소금 간을 살짝 해 먹으면 특별한 기교 없이도 고소하고 든든한 한 끼가 된다. 카레를 만들 때 템페를 조각 내 함께 넣어도 좋고 파스타 만들 때 넣어 먹어도 좋다. 개인적으론 맛이 강한 것보단 소금, 후추 정도의 심플한 간이 템페의 맛을 잘 살릴 수 있었고, 크림소스보단 토마토소스가 템페랑 잘 어울렸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템페를 구워 김밥으로 만드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야채를 가득 넣어 만든 김밥은 아삭아삭하고 푸릇해 참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