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는 마치 봄 같은 존재였다. 겨울이 다가오는 날씨였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레는 감정 탓에 나는 누구보다 따뜻한 봄을 보내고 있었다. 무심한 듯 다정한 태도, 나와 잘 맞는 음악 취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대화까지 그와의 봄은 내가 느낀 어느 봄 보다 따뜻했고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아갔다.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며 새벽까지 대화했던 그 시간은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한다. 세상에 나와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하루하루가 놀라워 매일을 웃으며 살아갔던 것 같다. 그 덕분에 나의 고등학생 시절은 예쁘게 포장되었다. 나는 겉으로는 티를 딱히 잘 내지 못하는 편이라 큰 내색은 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함께 한 모든 길이 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마치 호주머니 속 언 손을 꺼내며 비로소 시작된 이야기 같았다. 구체적이고 뚜렷한 봄은 아닐지라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매 순간 자연스레 항상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듯, 늘 봄이 내 곁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와의 인연은 지속되고 있었지만 지난봄과 달리 유난히 쌀쌀한 느낌이 들었다. 꽃샘추위가 너무 오래가고 있었다. 누구도 해치지 않는 불을 꿈꾸었지만 이 꿈에서 깼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 속에는 나와 봄을 지냈던 그도 함께였다. 이 낌새를 눈치챈 나는 마지막을 가장한 만남을 이후로 그와의 이별을 고했다. 그와의 관계를 유지해 봤자 더 이상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마지막 만남조차 너무 좋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행복이었다. 이 감정에 매몰되어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이것은 결코 나에게 건강한 관계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이해하고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고민하던 언젠가,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때의 나는 당시의 감정도 많이 정리되었고, 심적으로도 더 성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연락이 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노력했다. 과거를 떠올리면 우리는 너무 어렸고, 미성숙했다. 그렇기에 그도 실수를 할 수 있고 감정에 혼란이 왔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일부 미화되어 좋은 추억만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힘들었던 감정도 뚜렷하게 기억나기에 좋은 말로 그를 내돌렸다. 그가 나와의 좋았던 추억을 나열하며 말하였을 때,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손에선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지만 내 진심이 과거를 반복할까 두려워 숨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내가 그에게 받은 사랑과 위로는 유통기한이 없다. 시간이 지나도 은연중에 떠오르며 나에게 힘이 되어주곤 한다. 어쩌면 그와 나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관계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른 계절로 넘어간 것이다. 이제는 나도 그의 지난봄에 머물며 문득 떠오르는 존재가 되어있길 바란다. 예쁜 걸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책장 위에 차곡차곡 모아 온 것들을 이제는 진정 예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관계는 언제나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균열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받은 진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잃은 것이 있다고 느꼈던 그 관계에서, 나는 사실 많은 것을 얻었고, 나 역시 누군가의 ‘봄’이 될 수 있기를 꿈꾸게 되었다.
25년 유독 선선한 5월에